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 C.S.Lewis -

by 이재원 Jan 25. 2020

겨울을 보내주는 속도

요즘 들어 조금 따뜻해졌나 싶었더니, 거리에서 보는 사람들의 복장이 벌써 한결 가벼워졌다. 조금만 지나면 나 혼자 패딩 입고 다니는 거 아닐까, 매년 똑같은 고민을 한다. 추위를 많이 타는 나는 매년 가장 늦게까지 패딩을 입고 다니는 사람이었다. 나는 개나리 새순이 올라오는 시기를 지나, 노란 꽃몽오리가 될 무렵 겨울 옷을 벗는 사람이다. 올해도 언제나처럼 남들 눈치를 슬슬 보면서 겨울 옷들을 정리해야겠다. 매년 그랬듯 최대한 늦게, 그렇다고 '엄마, 저 아저씨는 아직도 겨울옷 입고 다녀.'라는 소리는 듣지 않을 정도로만 늦게, 내 속도에 맞춰서 천천히 겨울을 보내줘야지.




두 주 전, 냉장고를 열어보니 유자청이 들어있었다. 거제까지 휴가를 다녀온 친구가 고맙게도 사다 놓은 것이다. 거제도에서 농사를 짓는다는 사실도 몰랐는데, 유자 농사를 짓는다니, 그래서 유자가 특산품이라니. 나는 거제도에서는 어업만 발달했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보름이나 지나도 유자청이 통 줄어들지 않자, 유자청을 가지고온 친구는 퍽 울상이었다.

사이다에 유자청을 넣어서 유자 에이드를 마시면 좋겠다던지, 피곤하면 유자차를 마셔보는 것은 어떻냐던지, 잠이 안오면 따뜻한 유자차를 마셔보는 것은 어떻냐던지. 사방에 권유하고 있었다. 안 그래도 이번 겨울은 유자차 한 잔 제대로 마실 여유가 없어서 아쉬웠는데 맛있겠다 생각한 것이, 벌써 예쁜 마음으로 사 온 사람에게 미안할 정도로 시간이 지나버렸다.


그리고 보름이 지난 오늘에서야 유자청 한 스푼 가득 컵에 담아 따뜻한 물을 부어, 가만히 한 잔 마신다. 나는 겨우 유자차 한 잔 마시기까지도 이렇게 많은 시간이 필요한 사람이다. 이토록 여유가 없는 사람이 되어서, 유자청 가득 담긴 병을 비우고 겨울을 보내주고 싶은 마음을 헤아리지 못했었다. 설 연휴가 끝나고 다시 보게 되면, 이제 나도 겨울을 보내줄 마음의 준비가 되었으니, 이제 남은 유자차를 마시고 봄 맞으러 가자해야지. 겨울을 보내줄 준비가 늦어서 미안하다고 사과해야지. 유자차 한 잔 마시기까지 걸리는 시간보다, 길었던 지난 겨울을 보낼 낼 준비를 하는데 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고, 다시 한 잔 유자차를 마셔야지.

이재원 소속 직업개발자
구독자 72
매거진의 이전글 매일의 숙제

매거진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