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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원 Feb 23. 2020

함매의 구순잔치

행복해볼게요

얼마 전 할머니는 아흔 번째 생일을 맞이하셨다. 내게 '할머니' 보다는, '함매'라고 불리는 게 익숙한 할머니다.


어린 날의 기억 속에 흐릿하게 할머니의 환갑잔치가 남아있다. 빛 바랜 앨범 속에서 턱시도를 입고 빨간 리본을 매고 있는 나와 동생의 사진을 본 기억이 있다.


할머니는 잔치의 즐거움 속에서도 나만 보면 너는 언제 새색시를 데려올 것이냐며 구박이었다. 주변을 둘러보니, 나와 함께 유년시절을 보냈던 사촌들은 모두 짝과 함께다.

"함매 , 요즘은 세상이 바뀌어서 그런 말 하시려면 30만 원 내고 하셔야 돼."라고 말해보았지만, 그 짧은 잔치 시간 동안 30만 원은 받아내지 못했지만, 30번도 넘게 너는 언제 갈 거냐고 구박을 받아야 했다.


할머니의 환갑잔치에 찍은 옛 사진 속에 예쁘게 턱시도와 하얀 드레스를 입고 있었던 꼬맹이들은 30년이 흐르는 동안 결혼하면서, 혹은 결혼을 약속하면서 다시 한번씩 턱시도를, 드레스를 입고 사진을 찍었다. 그 사진 속에 담긴 사람들 중 나만 다시 예쁘게 옷을 입을 일이 없을 줄은 몰랐지.




지난 1월 1일이었다. 엄마는 할머니, 할아버지에게 점심 식사를 해드려야 한다고 분주했고, 나는 아침부터 일어나 할머니와 할아버지를 모시러 갔었다. 어느 순간부터 함매는 어린아이와 같다. 내가 찾아가면 아이처럼 기뻐하고, 아이처럼 조바심 낸다. 빨리 딸네 밥 먹으러 가야 하는데, 엘리베이터가 빨리 내려오지 않는다며 버튼을 꾹꾹꾹꾹 누르며 짜증 내는 함매를 보았다.


나는 어렸을 때, 할머니와 함께 살았다. 이제는 기억도 잘 나지 않는 어린 시절 나를 깨우고 학교에 보낸 것은 엄마가 아닌 할머니였다. 학교에 다녀왔을 때, 집에서 맞이해주던 사람도 할머니였고, 치과 가기 싫다는 나를 치과에 보내기 위해서 총채를 휘두르던 것도 할머니였다. 전등 스위치를 가지고 놀다가, 망가진다며 스위치를 꾹꾹꾹 누르지 말라고 혼냈던 것도 할머니였다. 이제는 내가 오히려 함매 손을 잡고, 그렇게 해서 엘리베이터가 빨리 오겠냐며 타박을 주고 있다.


함매는 자동차만 타면 똑같은 말을 하는 버릇이 있다. 그 날 생각나는 몇 가지 문장을 끊임없이 말하는 것이다.

"눈에 아주 선햐. 니가 태어날 때 아들이라고 너네 친할머니가 얼마나 좋아하던지. 눈에 정말 선햐."

겨우 20분 남짓 이동하는 동안, 토씨 하나 안 틀리고 어쩜 그렇게 똑같은 이야기를 하는지. 니체의 이야기가 맞다고 생각했다.


사람은 낙타, 사자를 지나서 아이가 된다고. 나는 함매가 낙타인 것을 본 적은 없지만, 사자였던 것을 기억하고, 이제 아이가 된, 같은 말을 반복하는, 같은 행동을 반복하는 할머니를 안다. 한 마리의 낙타가 되어 아이가 되어버린 할머니를 바라본다.




잔치가 끝나고, 할머니 할아버지를 집에 모셔다 드리기 위해서 내가 차출되었다. 평소 술을 안 마시는 나는 이렇게 술자리가 파하면 운전기사로 뽑히곤 한다.


"고맙다. 애들이 행복하게 잘 사는 모습 보여줘서 정말 고맙다."

외삼촌에게 하는 말이었다. 외삼촌은 아주 오래전에 미국으로 이민을 갔는데, 할아버지, 할머니 구순을 축하해드리기 위해서 혼자 한국에 와있었다. 외삼촌에게는 세 자녀가 있는데, 그중 둘이 작년에 아이를 낳았다. 지난겨울, 할머니, 할아버지는 아이를 보기 위해서 미국에 다녀오셨었다.


운전하면서 몇 번이나 들은 고맙다는 말이, 이제 행복하게 잘 사는 모습을 잘 보았으니 이제 여한이 없다는 의미로 남아, 내 마음을 힘들게 한다. 나는 함매에게 행복하게 잘 사는 모습을 보여준 적이 있었나. 나는 함매에게 행복하게 잘 사는 모습을 보여줄 수 있을까. 매일 엄마에게 전화해서, 아파 죽겠다고, 이제 갈 때가 되었다고 엄살을 부리는 함매의 말이 무섭게 다가오는 구순 잔칫날이었다.


나는 할머니가 원하는 행복한 모습을 보여줄 수 있을까?


"손주가 피짜 한 번 시켜봐라-"

소파에 가만 앉아서 피자를 주문하고, 역시 피자가 맛있다며 앉은 자리에서 네 조각을 먹는 함매를 보면 충분히 보여줄 수 있을 것 같기도 하지만! 행복해질 수 있도록 노력은 해야지. 성공하는 모습도 보여줄 수 있도록 노력은 해야지.

이재원 소속 직업개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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