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재원 Feb 26. 2020

호들갑 한 번 떨어볼까요

호들갑을 많이 떨면 아무 일도 없는 경우가 많다고 해요

"잔뜩 호들갑 떨고 나면 아무런 일도 없더라고요!"

살다 보니 다른 사람이 떠는 호들갑에 위로를 받을 날이 올 줄은 몰랐다. 호들갑을 많이 떨면 아무런 일도 없더라는, 그래서 대신 호들갑을 떨어주겠더라는 말이 힘이 된다. 그러니 나도 호들갑 한 번 떨어봐야지.




최근 몇 년간 내 삶은 스트레스에 완전히 노출된 상태였다. 내 몸이 플라스틱 재질이었다면, 스트레스에 몸이 풍화가 돼서 아마 진작 노랗게 빛이 바래었으리라. 앗, 그러고 보니 내 얼굴이 요즘 노랗게 보이던데 어쩌면 조금은 그런 연유가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이런 스트레스에 무방비한 삶이 이어지다 보니 어느 순간 두려워진 것이 있었다. 미련하게도, 몸이 안 좋을 것을 뻔히 알고 있으니 병원에 가고 싶지 않은 것이다.


치과 비용이 많이 나올까 봐 두려워서 치과에 가는 것을 미루다가, 울면서 백만 원이 넘는 치료비를 납부한 과거를 갖고 있다. 치아 상태가 안 좋을 것이라고는 알고 있었다. 통증은 없었지만, 십여 년 동안 한 번도 치과를 방문한 적이 없었고, 어렸을 때 때웠던 아말감의 수명이 다했을 것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미루던 끝에 방문한 치과에서 치아 7개 치료를 받았다. 이보다는 통장이 아팠다.


마음속 한 구석에서는, 막연하게 이 몸뚱아리의 어느 한 쪽이라도 안 좋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병원에 가는 것을, 검진을 받는 것을 차일피일 미루어왔다. 아이처럼 조금 핑계를 만들어보자면, 나는 몇 년을 외국 회사에 근무했고, 그 이후로는 혼자서 일을 하고 있었기에 지금까지 건강검진을 받을 기회가 마땅히 없었다. 회사에서 억지로 떠밀기라도 했으면 검진을 받았겠는데, 떠미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니 막 사는 사람은 지금 말짱하다는 이유로 검진을 미뤄왔던 것이다. 그러다가 드디어 건강검진까지 떠밀려졌을 때, 엄마는 내심 걱정이었다. '니 몸이 괜찮을 리가 없는데...'


사실 나도 그렇게 생각했다. 내 몸이 괜찮을 리가 없지...




'그래, 내 몸이 괜찮을 리가 없지!'

막연한 의심이 확신으로 바뀌는 데에는 몇 시간 걸리지 않았다. 내 초음파 영상을 확인한 의사 선생님은 "헉, 진짜 큰데."라는 혼잣말을 무심코 뱉어서, 엄마와 나와 내 동료들의 잠정적인 추론, 내 몸이 괜찮을리가 없다는 사실을 현실로 가져다주었다. 다양한 상황을 고려했을 때, 암일 수 있으며, 암이 아닐지라도 수술은 필요할 것 같다며 진료의뢰서를 작성해주었다. 나는 생각보다 담담하게 진료의뢰서를 받아 들었다. 진료의뢰서에는 내 몸에 엄지손가락 마디만 한 혹 하나와 새끼손가락 마디만 한 혹이 사이좋게 붙어있다는 내용이, 이 환자를 잘 부탁한다는 내용이 쓰여있었다.

버스를 타고 사무실로 돌아가면서, 인터넷을 검색해보았다. 그간 아무리 잠을 자도, 아무리 쉬어도 풀리지 않던 내 피로감이 이해되는 순간이었다.




나는 생각보다 담담히 달력을 보았다.

내가 회사를 일주일 정도 비울 수 있는 시기가 언제 즈음인가를 가늠하다가, 이제 막 식사를 마치고 돌아온 회사 동료들에게 말했다. 수술을 받아야할 것 같다고. 자리를 비워야 할 것 같은데, 언제쯤 내가 자리를 비울 수 있을까요, 하고. 그제야 동료들은 하나 같이 호들갑이다. 내가 하루라도 없으면 곧 죽을 사람 같이 야단법석이다.


오후에는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수술을 받아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엄마도 나와 같이 담담한 반응이다.  '그래, 니 몸이 괜찮았을 리가 없지!' 그래도 심각한 부위가 아닌 것이 어디냐며. 요즘 엄마가 심심하니 병원 갈 때 같이 가주겠다며, 언제 병원을 갈 거냐 물어보았다. '스케줄 좀 확인해보고 예약할게-' 하고 전화를 끊었다. 적어도 병원에서 대기하면서 심심하지는 않겠다. 다행히도 엄마 역시 크게 걱정을 하지는 않는 것 같다. 아아, 하마터면 불효자가 될뻔 했다.


시간이 지나자 나는 담담함을 넘어서 홀가분한 기분이 든다. 지금까지 왜 몸이 이렇게 피곤한지 알 수 없었는데, 이제는 이유를 알게 되었으니까. 그리고 고치면 지금보다 더 나아질 것이라는 기대가 있으니까. 홀가분한 내 주변에는 호들갑을 떠는 동료들로 북적인다. 저녁밥을 고민하는 내게, 환자니까 죽을 먹어야한다며, 아니 환자니까 건강하게 먹어야한다며 다투는 이들이 있다. 당신들 때문에 스트레스 받아서 이렇게 된 것 같다고 하니, 자신들이 멀쩡한 게 이상하다며 받아주는 이들이 있다. 경험상 잔뜩 호들갑을 떨고 나면 아무 일도 없었다는, 그래서 내 대신 호들갑을 떨어주겠다는 동료가 있음에 감사하고 기쁘다.






모든 호들갑을 동료들에게 맡길 수 없으니, 나도 호들갑이나 떨어봐야지.


수술을 하면 일주일은 걸릴 테니 이참에 미뤄두었던 게임을 잔뜩 해야지! 미래의 내가 재밌게 즐길 거라며 잔뜩 사두었던 게임이 설치도 한 번 되어보지 못한 채, 온라인 라이브러리에서 울고 있잖아. 이제 구제해줄 때가 되었지. 그리고 아제로스도 고대신의 위협으로부터 지켜야되는데, 너무 오랫동안 지키지 못하고 있었네.


입원 치료가 끝나면 비행기 값도 싸니 해외에 나가서 천천히 회복하고 와야지. 몸이 아픈 사람을 일로 찾지는 않을 테니 뽀지게 놀 수 있지 않을까. 그래도 나를 찾으면, 기어코 나를 찾아야겠냐며 엉엉 우는 소리를 내야지. 너무 아픈 시늉을 많이 해서, 모두가 꾀병으로 착각할 정도로, 그래서 아무도 나를 신경 쓰지 않을 정도로.

매거진의 이전글 함매의 구순잔치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