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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원 Mar 04. 2020

오후 11시, 치킨이 있는 삶

처방전: 야식으로 치킨을 먹을 것

"보통 이 나이대에서 이 질병의 가장 큰 원인은 스트레스인데요... 어떤 일을 하시나요?"


의사 선생님이 말했다. 가슴에 붙은 이름 아래 '전문의'라는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나는 전문의 공인 스트레스가 많은 사람이었군! 생각에 괜히 웃음이 나왔다. 어쨌든 인정 받는 사람이다.

'그냥, 회사일을 하고 있어요. 사무직.'이라고 말을 했다. 적어도 거짓말은 하지 않았다.



"평소에 스트레스 어떻게 푸세요?"라는 질문을 받았다. 나는 내 동료를 지긋이 바라보다가 대답했다.

"처먹어서요."

점심으로 샐러드를 먹은 참이었다. 샐러드도 다 먹지 못하고, 먹다가 힘들다고 조금 남겼었다.

처먹어서 스트레스를 푼다고 얘기했는데, 풀쪼가리나 먹고 있다니... 급격히 최근 내 삶이 비참하게 느껴졌다.  아아, 처먹어야 되는데... 처! 먹어야되는데...


"근데 요즘 처먹질 않네요..."

스트레스가 잔뜩 쌓여있음을 자인하는 순간이었다.


겨울 내내 스트레스를 받는다는 이유로 잘도 처먹었더랬다. 그렇게 먹어놓고는, 잘 먹고 찐 살을 뺀다는 이유로, 운동을 한다는 이유로 최근은 또 열심히 식단을 조절하고 있다. 냉장고에는 곤약으로 지은 냉동밥과 양념이 되지 않은 닭가슴살이 한가득 들어있다.


평소 나는 맛과 칼로리는 정비례한다는 건강한 논리를 주장하는 사람이다. 음식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는 주장을 펼친다. 세상에 건강하지 않은 음식은 없다고; 육체적인 건강에 좋거나, 정신적인 건강에 좋거나.

이 중에서 나는 정신건강에 좋은 음식을 더 사랑하는 사람이다. 치즈가 듬뿍 들어있는 피자를, 기름이 잔뜩 나오는 곱창을, 튀김옷이 바삭한 치킨을 좋아한다. 이렇게 적어놓고 보니 최근 나는 통 사랑을 하지 않았다네. 스트레스는 사랑으로 풀어야 하는 것을.



최근의 나는 스트레스가 꽤 심한 편이었다.


아마도 건강 상태가 그다지 좋지 않다는 이야기를 들어서 일 테다. 그리 심각하지 않다며 웃어넘기고, 호들갑도 피워보아도, 괜히 싱숭생숭하고 내 처지를 비하하게 된다. 나는 어쩌다가 병을 얻었는가, 나는 어쩌다가 이 모양이 되었는가 생각의 꼬리를 물다가 마지막은 나는 어쩌다가 이런 내 심정을 마음 편하게 이야기할 곳도 없게 되었는가 싶어 괜스레 우울해질 때가 있다. 이걸로 나는 또 스트레스를 받겠고, 스트레스는 병을 키우겠고, 나는 또 스트레스를 받겠지. 엑셀을 처음 배울 때, 가장 많이 겪는 오류였다. '순환 참조 오류'. 어서 빨리 순환 참조를 끊어내야 하는데, 수식이 이토록 짧은데도 어느 부분을 손을 봐야 할지 모르겠다. 순환 참조로 스트레스는 늘기만 하는데, 또 다른 일들로 신경 쓸 일이 많으니 뒷목이 마비되는 느낌이었다.


그런 기분으로 잠에서 깬 오후 10시였다.

옷을 입고 밖으로 나가서 치킨을 몇 조각 사 왔다. 오전의 대답, '처먹어서 풀어요.'는 탁월한 답이었다. 잘 처먹으니 기분이 한결 낫다. 잘 먹었으니, 잘 처먹었으니 이제 아무런 스트레스도 없다. 스트레스가 없으니 다른 사람한테 화를 낼 일도 없다. 다른 사람을 원망할 일도 없다. 우울할 일도 없다. 나는 내일도 내 일을 잘할 수 있다.


못할 것 같은 기분이 들면 또 다른 닭을 먹어야지. 처방전을 받는 기분으로 건강에 좋은 치킨 한 마리 시켜야지.

앞으로 죄책감 없이 치킨을 먹을 수 있음을 앎에 기쁜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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