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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원 Apr 03. 2020

보통 사람으로서의 삶

나를 낳은 후 엄마는, '미라'라는 이름 대신, '엄마'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고 했다. 재원 어미, 재원 엄마. 나를 낳기 전 엄마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나는 엄마가 정말 좋지만, 사실 나는 나를 낳기 전의 엄마를, 내가 말을 하고 사고하게 될 수 있게 되기 전까지의 엄마를, 알지 못한다.


내 일을 시작한 후, 나는 인간 이재원보다는, '대표'의 삶을 살고 있다. '재원씨'라는 이름으로 나를 부르는 사람보다, '재원아'라고 부르는 사람보다 '대표님'이라는 호칭으로 나를 부르는 사람이 많아졌다. 호칭만으로도 나와 그 사람이 정의되는 것 같아서, 결코 교차하지 않음을 명시하는 것 같아서, 나는 대표라는 호칭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내가 나를 낳기 전의 엄마를 모르는 것처럼, 아마도 지금의 나를 대표라고 부르는 사람들은 대체로 대표가 아닌 이재원이 어떤 사람인지는 모를 것이다.


생일을 맞이한 동료의 케이크를 사려고 4만 원짜리 케이크를 덜컥 결제하는 '대표' 역할을 하는 내가 있다. 그리고 사용하던 선크림이 다 떨어져서, 올리브영에 들러 만오천 원짜리 선크림을 들었다가 놓았다가하며 구입을 고민하는 내가 있다. 이따금 통장 잔고를 보며 걱정하는 나는 때로는 대표로서의 내 결정이 후회되기도 한다. 에잇, 내가 그 케이크만 안샀다면 별 고민없이 선크림을 살 수 있었을텐데! 내게 주어진 역할만큼 통장이 딱 나뉘어져있다면 좋았을 것을.


할인 코너를 빙글빙글 돌며, 할인해서 이만오천 원, 포인트를 사용해서 만오천 원짜리 선크림을 살까 말까 고민하는 내 삶에 함께하는 이가 없음에, 이런 내 삶을 아는 이가 없음에 조금은 외로운 주말이었다. 고민의 끝에 집어 든 선크림을 계산하고 나오면서, 내가 케이크에 대한 감사를 받았던가 곱십어보다가 괜한 생각을 한다며 죄책감이 생기는 주말이었다. 감사받고자 한 일도 아닌데, 내가 대체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건지... 나는 여전히 일과 나를 분리하는 게 서툴다. 형편 없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사진을 정리하다가 2013년 봄이 오기전에 찍은 내 사진을 발견했다. 사진 속의 나는 아주 예쁘게 웃고 있다. 거울 앞에 서서 웃어보니, 이제 나는 예쁘게 웃을 줄 모르는 사람이 되었나 보다. 사진 속의 나처럼 웃을 수 없게 되었다.


사진 속의 아이는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생이 되었단다.

한때 나는, 이 아이와 평생 친구가 되어주고 싶었다. 유치원 입학식을 보았고, 운동회 때는 학부모 대신 부모 아이 달리기 대회에 참여했었다. 초등학교 입학식을 보았고, 종종 크리스마스를 함께 보냈다. 그런데 지금 이 아이는 나를 기억하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아니 기억하고 있더라도, 이 아이가 기억하고 있을 나는 없어졌는지도 모르겠다. 언젠가 나중에, 아이가 사진을 보면서 내가 떠오르더라도, 2013년의 나로, 보통 사람인 나인채로 기억해주었으면 좋겠다. 내 삶에 보통 사람으로 나를 기억해주는 사람이 아무도 남지 않았음을 문득 깨닫는 밤이다. 아침이 오면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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