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재원 Sep 12. 2020

이력서에 게임 경험을 적었습니다

온라인 커뮤니티 기여자는 자신의 경험을 부끄러워하지 않아도 괜찮다.

저는 게임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에서 공격대장 역할을 맡아 동료들을 지휘하여, 수많은 위협으로부터 아제로스 세상을 지켜냈습니다.


면접 자리에서 이런 발언을 한 사람이 있다고 생각해보자. 아마도 면접 자리에서 엄청난 집중을 받을 것이다. 만약 공개 채용이었고, 옆 자리에 다른 면접자들이 있었다면, '게임 빌런'이라는 이름으로 인터넷 공채 커뮤니티에 이름을 날리게 될 것이다. 그 회사에서는 '면접 또라이' 라는 별명으로 소문이 퍼져나갈지도 모른다. 이력서에 적었다면, 면접 자리에 가지도 못했을지도 모른다.


일반적으로 자신의 경력을 이야기할 때, 사이버 세상, 그것도 게임 세상의 경험을 포함시키는 사람은 잘 없다. 그런데 나는 이러한 일반적이지 않은 사실을 뻔뻔하게 이력 사항에 넣는다. 회사를 설립했던 2018년, 나는 첫 번째 채용 때, 회사를 소개하기보다는 나를 소개하는 글을 작성하고 '저와 함께 해주세요.'라는 글을 올렸었다. 나에 대한 소개는 이런 식으로 시작했다:


참 열심히했는데.. 못한지 좀 오래됐다.


나는 게임 세상의 경험이 현실 세상에 그 어떠한 영향도 미치지도 않는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나는 게임 플레이로 인하여 긍정적으로 많은 영향을 받았으며, 그러한 경험이 없었다면 이 자리까지 올 수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력서에 게임 경력을 적었던 남자


세상은 넓고 비슷한 행동을 하는 사람은 많다. 나는 나와 비슷한 행동을 하는 사람 중에, 세계적으로 성공한 사람이 있다는 것에서 큰 위안을 얻는다.


과거 스타벅스 CIO로 근무하였던 '스티븐 질렛'은 스타벅스, CNET, 베스트 바이에서 임원진과 일한 인상적인 경력을 갖고 있다. 그와 동시에 게임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에서 성기사와 사제로서 공격대의 회복을 책임지는 영예로운 역할을 수행했다. 이러한 사실이 알려진 것은, 그가 이력서에 자신의 게임 이력을 작성했기 때문이다.


직장에 지원을 할 때 이력서와 자기소개를 적는 목적은 하나다. "이러한 이유로 저는 이 자리에 뽑힐 자격이 있습니다."라는 것을 회사에 알리기 위함이다. 그러한 이유로 질렛은 이력서에 자신의 길드를 기입하였고, 게임 내 순위를 기입하였고, 온라인 세상에서 이룬 업적들을 작성했다. 이러한 업적들은 질렛이 CIO로 근무했던 스타벅스에서도 잘 발휘되었다.


질렛이 스타벅스에서 일을 하는 동안, 스타벅스는 고객의 체험을 '게임화'했다. 우리는 이제 스타벅스에서 별을 적립하여, '골드 등급'으로 승급하고, 보상을 받기 위해서 포인트를 쌓는 행위에 충분히 익숙해져 있다. 이러한 게임화의 결과가 어떤지는 2020년 여름, 스타벅스 서머레디백 사례를 보면 누구나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올해 여름을 강타한 스타벅스의 서머레디백. 다양한 사회현상을 낳기도 했었다.


질렛이 게임 세상에서의 업적을 이력서에 적은 이유는, 그러한 업적들이 단순히 사이버 세상에서의 무언가가 아니라 현실 세상에도 반영되는 중요한 의미가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나는 질렛의 의견에 완전히 공감한다.


CNN Tech의 기사: Why I Put World of Warcraft on My resume는 질렛이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 경험을 이력서에 넣는 이유에 대해서 인터뷰한 내용이다. 꽤 재미있는 내용이니 읽어볼만 하다.

게임 경험이 나에게 먼저 알려준 것


나는 어렸을 때부터 남들 다 해본다는 반장 한 번 해본 적 없는 사람이다. 또한 남들 앞에 나서서 발표를 해본 적도 없으며, 대학교를 다닐 때 전공의 특징상 남들 다 해본다는 팀플도 한 번 안 해봤다. 남들 다 하는 경험조차 안 해봤기에 처음 회사를 시작했을 때 불안한 마음이 컸지만, 지나고 나니 모든 순간에 나는 적절한 판단을 했던 것 같다. 서비스를 처음 만들기로 한 순간부터, 사람을 모으고, 한 단계씩 서비스를 올려가는 모든 과정에서 게임 경험의 도움을 받았다.


심지어는 사용자 경험을 구성하는데도 도움을 주기도 했다. 나는 우리 서비스의 사용자 경험을 디자인할 때, 과거 플레이했던 게임들에서 영감을 받을 때가 많다. 우리 조직이 제공하는 서비스가 게임과는 전혀 관계 없는 B2B SaaS 솔루션임에도 말이다.


게임에서 배운 사용자 경험 이야기: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 군단에서 "악마 크로서스"를 공략하던 중.


게임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 세상에서 나는 공격수를 전담하는 사냥꾼이자, 던전의 전체 공략을 리드하는 공격대장으로서의 삶을 살았다. 현실을 살고 있는 이재원이 회사에서 기획자이자, 사업 전체를 총괄하는 대표 이사로서의 삶을 살고 있는 것과 흡사하다. 이 둘은 꽤 많은 공통점을 갖고 있다.


공격대장이 수행해야 하는 일은 이렇다:


던전을 공략하기 전에 던전 공략을 위한 정보를 수집한다.

공격대장은 던전에 진입하기 전에 어떠한 종류의 몬스터들이 나오는지, 몬스터의 공격 패턴은 어떠한지, 지형지물은 어떻게 배치되어있는지 미리 조사를 해두어야 한다.


던전 공략을 위해서 수집한 정보를 바탕으로 전략을 수립해야 한다

이미 공개된 정보를 기반으로 하여, 던전 공략 중 발생 가능할 수 있는 일들을 나열하고, 각 일들에 대한 대응 방안을 정립해두어야 한다.

만약 세계 순위권을 다투는 그룹이라면, 아무도 해본 적 없는 길을 시도하여, 실시간으로 전략을 구성해야 하는 기민함도 요구된다.


수립한 전략을 토대로 함께 던전을 공략하기 위한 인력을 모집해야 한다

전략이 도출되면, 나와 함께 던전을 공략할 인원을 모아야 한다.

인원을 모을 때는, 원하는 사람을 모두 다 데려갈 수 없다. 공격대장은 시스템의 한계 안에서 적절하게 필요한 사람을 구성해야 한다.


잘하는 사람을 모셔와야 한다

쾌적하게 게임 공략을 하기 위해서는 잘하는 사람이 필요하다. 잘하는 사람을 데려오기 위해서는, 공격대가 잘하는 것으로 유명하거나, 잘하는 사람과 관계가 좋거나, 보상을 쥐어주면 된다.

정말 잘하는 사람은 단순한 보상만으로 오지 않는다. 정말 잘하는 사람은 공격대장이 유명한지를 확인하거나, 공격대에 정말 잘하는 사람이 있는지 확인하기도 한다.


커뮤니케이션에 능숙해야 한다

공격대장이 구성한 공략을 공략 시행 전에 잘 브리핑해야 한다. 다양한 상황들에 대한 행동 방침을 꼼꼼하게 전달하여, 각자가 맡은 업무를 잘 수행할 수 있도록 한다.


정보 전달 균형을 잘 맞춰야 한다

공략 과정에서 너무 디테일하게 설명을 하면, 던전 공략 시간이 길어질 것이고, 너무 간략하게 설명을 하면 던전을 공략하지 못할 것이다. 공략 전달을 어디까지 해야 하는지 균형을 잘 맞춰야 한다.


빠른 상황 판단을 내려야 한다

공격대가 던전을 공략하는 과정에서는 다양한 문제점을 만나게 된다. 특정 임무를 수행하기로 했던 사람이 사망했다던가, 생각과 다른 형태로 게임이 전개되었다던가 하는 식으로 예상하지 못한 상황을 맞이하게 될 때가 있다. 이럴 때 공격 대장은 민감하게 상황을 판단하고, 각 상황에 따른 판단을 내리고, 모두가 공략을 위해 적절한 행동을 할 수 있도록 지시할 수 있어야 한다.


문제점을 확인하고, 빠르게 개선해야 한다

공격대가 던전을 공략하던 중에, 벽에 부딪혔다면 우리가 어떤 문제가 있어서 나아가지 못하는지 확인해야 고생을 하지 않을 수 있다.
동일한 곳에서 계속 전멸하는데, 문제가 무엇인지 발견하지 못한다면 개선할 수가 없다. 문제점이 있으면, 어떻게든 문제의 원인을 찾아서 개선해보고, 최적화해야 한다.


사람이 문제인 경우 적절하게 해결해야 한다

공격대가 던전을 공략하던 중에, 특정 사람이 지속적으로 문제를 발생시키는 경우가 있다.
눈에 띄게 문제가 되는 경우가 있고, 눈에 띄지 않게 문제가 지속되는 경우도 있다.
어떠한 경우더라도 공격대장은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을 찾아서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도록 해결해야 한다.


어디에서 많이 본 것 같은 느낌이 들지 않는가?

이러한 임무는 실제로 회사 경영자가 경영을 하면서 신경 써야 되는 것들과 굉장히 닮아 있다. 경영자는 사업을 잘하기 위해서 정보를 수집해야 하며, 수집된 정보를 바탕으로 전략을 수립해야 한다. 전략을 함께 수행할 인재를 모셔와야 하기도 하며, 그 와중에 잘하는 경력자를 채용해야 하기도 하다. 경영자가 바라보는 시각을 구성원들에게 잘 전달해야 하고, 빠르게 상황 판단을 내려야 한다. 이런 것들이 단 하나라도 잘 수행되지 않으면, 회사는 그 자리에서 멈춰 선다.


이러한 것들은 사실 경영자가 되기 전에는 체험하기 어려운 것들이다.

다행히 게임 세상에서 나는 상위 1% 그룹들만이 성공적으로 공략할 수 있는 던전들을 리더로서 공략해보았다.게임 커뮤니티에서 리더십을 발휘했던 경험이 회사를 운영하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는 데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


이력서를 기술하는 이유는 어떤 일을 수행하는데 내가 얼마나 적합한지 소개하기 위함이다. 나는 내가 회사를 경영하기 적합한 사람이라는 것을 소개하기에, 게임 세상에서 리더십을 발휘했던 경험이 결코 부족하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채용공고를 올릴 때면 자신있게 게임에서 내 업적들을 서술해둔다. 만약, 내 게임에서의 업적을 저술해놓은 이유로 지원자가 없다면 나는 별로 아쉬움을 느끼지 않을 것이다. 만약 그런 이유로 지원서 접수를 포기한 사람이 있다면 나와 그리고 우리 조직과 문화적으로 핏이 맞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온라인 커뮤니티 기여자를 우대합니다


처음 회사를 시작했을 때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사람을 채용해야 할 때가 오면 공통적으로 작성했던 문구가 있다. 온라인 커뮤니티에 기여한 경험이 있으면, 망설이지 말고 기재해달라는 것이었다.


회사에서 이력서를 요구하는 이유는 명백하다. 이 사람이 얼마나 회사의 업무에 기여할 수 있는지를, 구직자가 기술한 기존의 경험을 토대로 유추해보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나는 게임 세상에서 했던 경험들을 잘 말하는 것은, '게임 빌런'이 되는 것이 아닌, 자신을 잘 어필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게임이 아닌 다른 온라인 커뮤니티에 기여한 사실, 예를 들어 위키 커뮤니티에 기여했다는 것은, '나무위키 빌런'이 되는 것이 결코 아니라고 생각한다. 나는 현실에 기여하기 위해 관심도 없는 분야에 참여해가며 만든 억지 레퍼런스보다, 자신이 속한 커뮤니티의 발전을 위해 개인의 흥미 본위로 기여한 것이 훨씬 더 가치있는 레퍼런스라고 믿는다.


어느 날 인터넷에서 보았던 '파랑 빌런' 이야기. 파랑 빌런은 최종적으로 합격했다고 한다.


실제로 나는 회사를 차리기 한참 전, 지난 회사에 들어 갈 때, 내 채용을 결정했던 부사장님과 팀장님께 게임에 대한 나의 생각들을 꽤 열심히 이야기한 경험이 있다. 그 이야기가 내 채용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실제로 나는 채용이 되어 4년 동안 무리 없이 일을 했었다.

때로 나는 동료들에게 게임에서 성취한 나의 업적에 대해서 이야기 하기도 한다. 그러한 성취들이 나를 잘 설명해줄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에는 적어도 10만 명 이상의 사람들이 게임을 플레이하고, 하루에 적어도 1만 명 이상의 사람들이 온라인 커뮤니티에 글을 작성하여 온라인 사회에 기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인의 이력서에서 온라인 커뮤니티에 기여한 경험을 볼 수 없다는 것은 사회적으로 그리고 개인적으로 슬픈 일이라고 생각한다.


당신이 게임 세상에서 성취한 업적은 결코 부끄러운 것이 아니다. 당신이 인터넷 커뮤니티에 기여한 것들은 단순히 시간 낭비를 한 것이 아니다. 게임 세상에서 보고 배우고 달성한 것, 인터넷 커뮤니티에 기여한 모든 것들도 역시 성취의 일종이다. 그러한 성취를 잘 풀어내서, '내가 왜 이 자리에서 일을 잘 할 수 있는지'를 설명할 수 있다면, 많은 조직, 아니 적어도 우리 같은 스타트업 조직에서는 큰 환영을 받을 것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