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망치듯 이별을 통보받았다

깊어지지 못한 관계와 회피적인 태도

by 열닷새

약 한 달간의 짧은 연애가 끝났다. 독특한 계기로 서로가 가장 마음에 든다고 선택한 첫 만남이 특별하게 느껴져 이어가 보려 했지만 결국 끝이 났다. 그렇게 회피형과는 다신 연애하지 않을 거라던 다짐과 달리 또 회피형을 만났다. 상대는 나에게 "어느 정도 이상의 마음이 깊어지지 않는다."며 먼저 이별을 고했다. 어쩜 전 남자친구, 이제는 전전 남자친구가 된 그 사람과 똑같은 말을 하는지. 나 역시 주위에 "이상하게 상대에게 마음이 안 생긴다."는 고민을 자주 털어놓았지만 초반이라서 그런 거겠거니 했다. 결혼은 불같은 사랑이 아닌 잔잔한 사랑과 해야 한다던데 이게 그것인가 싶었다. 그래서 기다렸다. 그러다 헤어지던 그날 진짜 이렇게 관계를 유지하는 게 맞는 것인지, 먼저 헤어지자고 말해야 하는 건지 심각하게 고민했는데 아뿔싸! 상대가 먼저 선수를 쳐버린 것이다.


상대에 큰 기대가 없었고 내 입맛대로 바꾸겠다는 앙큼한 의지조차 없었기 때문에 다행히 상대의 부재가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 다만, '나만 마음이 안 생긴 줄 알았는데 너도? 심지어 네가 먼저 차?'라는 분노가 부글부글 끓어오른다. 그의 욱하는 성격, 가벼운 일인데도 한참을 짜증 내는 모습, "그럼 -해서 그렇지, -해서 그러겠어?"와 같은 가볍고 틱틱대는 말투 등에 실망이 쌓여가고 있었다. 그런데 너는 뭔데? 다 맞춰주고 심지어 자느라 한 시간, 두 시간을 지각해도 이해해 줬더니 감히 나를 차?!




첫 만남의 끌림에 속아 '연애 연극'을 하고 있던 것 같다. 그러면서도 전전 연애에서 터득한 회피형의 특징이 자꾸 보여서 나를 방어할 수 있도록 벽을 세워두고 마음을 주지 않았나 보다. 몇 번을 말해도 노력하는 모습조차 보이지 않았던 표현 문제로 나 역시 사귄 후로부터는 보고 싶다는 말을 일절 하지 않았고 먼저 만나자고도 하지 않았다. 지금 보면 상대도 노력을 하긴 했다. 표현을 좀 더 해달라는 내 요구에 긴 웨이팅을 하며 깜짝 선물을 주거나 먼 길 돌아 집에 바래다주는 등으로 "말보다 행동파"라는 대답을 증명했다. 그래서 오만스럽게도 나만 애정이 덜한 거라 믿었다.


행동으로 보여주다가 알고 보니 마음이 크지 않았다는 속내처럼, 상대는 때에 따라 말이 바뀌어 도통 속을 알 수 없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다 보니 말의 의도를 자꾸 의심하며 그대로 들을 수 없었다. 또 내게는 별 것 아닌 일인데 욱하거나 짜증에 매몰되는 경우가 있어 혹시 내 일상적 언행이 그에게 다르게 받아들여질까 조심했다. 결국 마지막의 그날, 계속 이 사람의 눈치를 보면서 만나야 하나 매우 심난했다. 다정한 사람을 좋아하고 애정표현으로 사랑을 확인하며 마음이 깊어지는 나는, 이런 상황이 쌓이고 쌓여 방어기제를 만들었고 마음을 주지 않음으로써 연애에 몰두하지 않았다.




차차 나아지고는 있지만 아직 일주일이 채 지나지 않은 지금까지도 굉장히 불쾌하다. '일정 수준 이상의 감정이 생기지 않는다고 헤어질 거였으면 애초에 고백을 왜 해서 시작한 거지?' 싶었다. 본능적으로 나를 보호한 덕에 실연의 여파는 없지만 자존감이 굉장히 떨어졌다. '혹시 그의 얕은 마음이 내 이성적 매력이 부족했거나 재미가 없어서라면 다음 연애는 어떡하지' 하는 걱정으로 자책하며 이유를 찾는다. 많은 생각 끝에 지금의 내가 깨달은 것은 상대가 연인 사이에 생기는 서로에 대한 책임감과 감정적 깊이를 부담으로 받아들이고 마음이 깊어지지 않는다는 핑계로 도망쳤다는 것이다. 결국 나는 또다시 누군가를 만나기가 굉장히 조심스러워지다 못해 두려워졌으며 연애 자체에 질린 기분이다.


한 편으로는 내가 쉽게 끝내지 못했을 관계를 먼저 놓아주어서 고맙기도 하다. 마치 도망갈 명분을 남기는 듯 입버릇처럼 "우리 나이에는 안 맞으면 빨리 헤어지는 게 맞아."라고 했던 상대니까 꼭 잘 맞는 사람을 만나 오래 잘 지내기를 바란다. 안타깝게도 그가 바뀌지 않는 한 당분간은 그의 과거 8번의 경험처럼 한 달 내지는 두 달의 단기 연애가 되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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