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마음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그래도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정말 조금씩 지그재그로 나아지고 있는 줄 알았고 아마 실제로도 그랬을 것이다. 이별 후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이란 일은 다 해봤다. 운동, 미술, 여행, 소개팅, 그리고 새로운 연애. 그렇게 차츰 지난 인연의 흔적이 지워지고 있던 참이었다.
잔잔해 보이는 듯했던 생활에 돌멩이를 던진 건 그 누구도 아닌 나였다. 내 잘못이었다. 열흘이 넘도록 낫지 않는 장염 증상에 반차를 냈던 지난 주, 병원 진료를 본 후 엄마와 근처 카페에 방문했다. 그냥 이렇게 평화로운 날이면 자연스레 전 연인이 떠오르곤 하는데 무슨 바람이 들었는지 그 사람의 번호를 지우고 싶었다. (사실 잊으려고 그랬다기 보다는, 그 사람이 나를 카카오톡에서 지우지 않았는지 확인해보고 싶었다ㅎ) 그러다 정말 우연히 손가락이 미끄러졌고 오른쪽으로 슬라이드가 되는 바람에 전화가 걸어졌다. 기겁하며 곧바로 끊었지만 지인들 변호로 테스트해본 결과, 기록이 남는 것이 확인되었다.
심장이 몸 밖으로 튀어나오는 것만 같았다. 매일같이 전화를 걸었는데, 이제는 통화 한 번으로 심장이 철렁하는 사이가 되었다는 점이 씁쓸하면서도 이 상황을 어떻게 해결해야할지 막막했다. 8개월이 넘도록 서로 연락을 한 적이 없었는데 실수든 뭐든 결국 내가 먼저 했다는 사실이 너무나 자존심 상했다. 혹시나 상대방이 본인을 잊지 못했다고 생각할까봐(사실이지만) 걱정됐다. 그리고 혹시나 아무 반응이 없다면 그것도 그것대로 힘들 것만 같았다.
그렇게 조마조마한 시간이 지나고 그날 저녁 익숙한 번호에게서 전화가 왔다. 온 몸의 피가 빠져나가는 기분이었다. 그렇게 기다리고 기다리던 번호였다. 현실에서도 꿈속에서도 수 십번, 수 백번을 상상했던 장면이었다. 그러나 상상과는 다르게 손이 움직이지 않았다. 너무 놀라 바로 소리를 꺼버렸고 패닉이 되었다. 전화는 한참을 울리다 끊어졌고 나는 받지 못했다. 할 말이 없었다. "네 번호를 지우려다가 실수로 잘못 걸었어."라고 할 수는 없었으니.
내가 받지 않으니 그는 주선자 친구에게 전화해서 이런 일이 있었다고 털어놓은 모양이다. 회사에 있을 시간인데 실수로 전화한 것 같다며, 혹시 내가 받았으면 어떡하려고 했냐는 질문에 무슨 일 있었는지 물어보고 잘 지내라고 하려고 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다음 달에 포항으로 회사를 따라 이사갈 예정이고 아직 누굴 만날 상황이 아니라고 덧붙였다고 한다.
절대 의도하지 않은 내 실수였지만 연락의 기회가 생겼으니 어쩌면 다시 만날 수도 있지 않을까 했던 기대가 와르르 무너졌다. 친구는 후회할 바엔 전화해서 포항 내려가기 전에 만나자고 하라며 나를 설득했다. 그치만 상대는 이미 마음이 확고해 결말이 뻔한 상황에서 굳이 한 번 더 상처를 받고싶지 않았다. 결국 나흘이 지난 지금까지 나는 그의 부재중 전화에 답을 하지 않고 있다.
문제는 이 날 이후로 다시 힘들어졌다는 것이다. 이제 정말 우연히도 마주칠 수 없는 곳으로 이사를 간다고 생각하니 꼭 이별을 처음 한 것처럼 마음이 아프다. 그리고 그의 부재중 전화가 마치 미련처럼 느껴져 일말의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 생각하며 한 번 더 붙잡고 싶어진다.
머리로는 너무나 잘 안다. 이미 본인 앞가림만으로도 힘든 상대방을 생각한다면 연락해서는 안된다. 설령 다시 만나더라도 같은 문제로 다툴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마음은 당장이라도 다시 연락하라고 아우성이다. 나도 모르게 전화를 다시 걸 것만 같다. 걸까 말까, 하루에도 수 십번씩 마음이 바뀌고 내내 울음을 참고 있는 기분이다.
그가 포항으로 내려간다는 다음 달, 참지 못하고 그 전에 한 번이라도 얼굴을 보고 이야기를 나누자고 할지. 이대로 영영 만나지 못하는 사이가 될지. 나도 내가 어떤 결정을 내릴지 도무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