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함이라는 착각에 취했던 한 달
연애에 있어서 나는 확실히 안정형은 아니다. 불안형이다. 아무것도 모른 채 첫 연애를 시작하고 얼마 뒤, 갑자기 상대가 나를 떠날까봐 걱정이 됐다. 나중에 이것이 불안형의 특징 중 하나라는 것을 알게 됐을 때 '그럼 그렇지.' 싶었다. 표현과 연락이 중요한 것부터 온종일 상대 생각에 매여있는 것까지. 그리고 그런 불안형은 회피형에게 나도 모르게 끌린다고 했다.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던 첫 연애 상대의 모습들이 회피형의 그것이었다는 것을 안 후로, 그리고 알게 모르게 상처를 받은 후로 다시는 회피형을 만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그런데 이 다짐이 무색하게도 더 심한 회피형과 다음 연애를 하게 되었다. 첫 만남에서부터 긴가 민가 하는 부분은 있었다. 하지만 대화가 너무나 재밌었고 외적(?)으로도 마음에 든 데다가 단체 소개팅에서 서로를 선택했다는 특별함에 취했다.
그 외에 내가 느꼈던 회피형의 징조는 여러가지 있다. 처음으로 단 둘이 데이트를 하던 날, 많은 질문을 했다. 먼저 잠이 많은 편인지, 혹시 회피형은 아닌지 물었다. 물론 대놓고 "나 회피형이에요."하는 사람은 없겠지만 상대방은 시원스레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에요."라고 하지 못하고 얼버무렸다. 그의 흔들리는 눈동자를 읽었지만 애써 외면했던 것 같다. 교대 근무를 감안해도 갸웃거리게 하는 그의 10시간 이상의 수면 패턴과 늦잠으로 인한 두 번의 지각을 겪고 불안함이 점점 짙어졌다.
또 상대는 시간이 갈수록 "굳이?", "글쎄.", "귀찮아."와 같은 수동적 성향의 말 혹은 말투를 자주 사용했다. 스스로 움직여 무언가를 하는 데 소극적인 모습이 많았다. 이런 모습을 계속 마주하니 연인으로서 무언가 데이트로 제안하는 데 눈치가 보였고 익숙하고 편안한 것만을 원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말이 바뀌는 경우도 많았다. 만남 초반 혹은 며칠 전까지만해도 A라고 했는데 나중에 이야기해보면 B라고 한다던가. 이런 일이 자주 반복되니 어디까지 믿어야할지 혼란스러웠다. 거짓말을 하는 건지 당시에는 정말 그 마음이었던 건지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 그러면서 말 한 마디에 더욱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상대와 나는 전 연애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했다. 처음엔 그가 먼저 물었고 나 역시 전 연애의 상처를 반복하고 싶지 않아 예방 차원에서 이야기를 시작했다. 사귀고부터는 상대에게 미안하게도 자꾸 비교가 되는 바람에 전 연인을 계속 떠올리다 이전 연애를 언급하는 일이 많았다. 이런 대화를 통해 상대의 직전 연애와 장기 연애의 이별 사유에 대해서도 알게 됐는데 너무나 회피형 그 자체였다. 어떻게 헤어질지 고민했는데 전 여자친구가 먼저 이별을 말해서 기분이 좋고 속이 시원했다던가, 장기 연애 때에는 권태감에 데이트 하러 나가기 싫어서 집에 있겠다고 했다가 헤어졌다는 것이다. 이 일화들을 듣고 적잖이 당황했고 결코 평범하지는 않다고 느꼈다. 열 번의 연애 경험 중 1년이 넘는 연애는 단 두 번 뿐인, 짧은 연애만 하는 게 회피형의 큰 특징임을 알았지만 설마 했다. 나를 만나기 전 두 번의 연애 모두 2달 만에 헤어졌다고 했지만 '나는 아니겠지.' 싶었다. 아주 멍청했다.
나는 이 사람과 특별하게 만났고 시간 가는 줄 모를 정도로 대화가 잘 맞으니 우리는 그러지 않을 것이라는 착각, 진정한 짝을 만나지 못해서 회피 성향이 나온 것이라는 착각, 그리고 내가 그 짝이 될 수 있을 거라는 착각이 나를 휘감았었다. 그러면서도 한 편으로는 회피형에게서 나를 지키고자 마음을 주지 않았고 주지 않으려 노력했다. 결국 그의 이전 연애보다도 짧은 한 달 만에 마음이 더 깊어지지 않는다며 이별을 통보받았다. 그리고 화룡점정으로 나를 두고 먼저 일어나겠다는 말까지 들었다.
어쩌다보니 상대 내지는 회피형을 탓하는 글이 되어버린 것 같지만 나 역시 전 연인을 잊지 못하고 방어적인 태도로 대했으니 이런 결말을 맺었다고 생각한다. 불안형으로서 그닥 떳떳하지 못하다. 상대가 용기를 내서 헤어짐을 고했고 나 또한 비슷한 감정이었으니 하루 빨리 끝낼 수 있도록 도움을 준 데 고마움도 느낀다.
이제는 더 깊은 회복을 통해 마음이 안정되었을 때 안정형의 상대를 만나 더이상 불안하지 않은 연애를 시작하고 싶다. 그리고 혹시 스스로를 멈칫하게 만드는 부분이 느껴진다면 관계를 이어가야할지 진지하게 고민을 해보아야 할 거 같다. 더 이상의 상처로부터 나를 지키기 위해서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