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를 증명하기 위해 성실히 사는 사람들
"돌이켜보면 나는 항상 그랬던 거 같아. 성장하는 거 같다가도 다시 똑같은 상태로 원상복귀 되는 패턴의 반복. 행동은 변한 거 같지만, 내면은 변하지 않은 그런 상태로. 나 스스로에게 즐거움을 주고 나면 스스로에게 죄책감이 뒤따라. '네가 이걸 즐길 자격이 있니?'. 그래서 망설여지는 것들이 많지."
"퇴행하는 거네요. 언니가 변화되고 성숙하려고 할 때 분명히 언니를 원래 상태로 뒷걸음질 하게 만드는 뭔가가 있을 거예요. 그걸 보통 내면의 어린아이라고 하죠. 언니 마음속의 어린아이가 지시하는 가치관에서 나와야 하는데, 그 아이는 언니 마음속에 있을 순 있지만 언니를 지배할 수는 없잖아. 왜냐면 지금 이 순간을 사는 건 언니 자신이니까."
정적이 흐르고 오토바이의 소음이 우리를 스쳐갔다. 다시 말이 이어졌다.
"그런 순간들이 있잖아. 언니도 모르는 사이에 근본을 알지 못하는 괴리감과 죄책감이 스멀스멀 언니를 지배하는 시간. 부정적 감정이 언니를 정복한다고 느껴지는 그 순간마다 적어. 노트에. 시간이 흐르고 난 뒤 다시 생각해보는 거야. 이거는 과연 죄책감을 느껴야 하는 사건이었나. 아니면 내 마음속 어린아이가 죄책감을 느끼라고 지시하는 사건인가."
"근데 나는 그렇게 생각하기 보단, 타인의 의견에 더 귀기울이다 보니까, 그런 걸 잘 캐치하지 못하는 거 같아. 이 사람이 이렇게 말하면 '그래, 이 정도는 괜찮겠지' 싶다가도 저 사람이 저걸 말하면 '아 이대로도 괜찮은가' 했던 거 같아."
"언니, 나는 언니가 가지고 있는 달란트가 진짜 많아서 그게 계발되었으면 좋겠거든요. 언니는 비교적 꼬이지 않은 사람이고 기본적으로 에너지가 많잖아. 그게 하나의 힘으로 모여서 정확한 타이밍에 그 힘을 다 쓰면 정말 많은 걸 할 수 있거든요. 비전에서나, 아니면 연애를 할 때나, 사람을 살리고자 할 때.
그런데 이런 사람들이 사연이 있고, 상처가 해석되지 않으면 대부분 '나는 상처받은 사람이야' 이거를 증명하려고 엄청 에너지를 쓰더라고. 예를 들면 저도 그랬어요. '나는 엄마 아빠가 내 인생을 보살펴주지 않았고, 나는 노는 거 좋아하고, 또 내가 놀만한 에너지도 있고, 사람들은 나를 좋아해주니까 나 엄청 놀러 다닐 거야.' 그거에 대한 좋은 점도 물론 있었지만 안 좋은 점은, 만약에 내가 그때 그 에너지를 내가 좋아하는 책을 읽는데 계속 썼다면, 또는 언어를 배우는 데 썼다면 엄청난 거를 지금 어느 정도 했었을 텐데.
상처받은 사람은 자기 상처를 증명하려고 성실하게 산다고 하는데, 나도 상당한 시간 동안 그렇게 산거 같아요. 지금 많이 아까운 것들이 있죠."
또 오토바이가 지나갔다. 마을버스였나. 엔진 소리가 우리가 있는 2층 카페 안까지 들어왔다.
"근데 분명히 언니 안에도 무언가를 하고 싶은 욕망이 있는 게 내 눈에 보이고, 또 재능도 있고. 아빠의 지원도 받을 수 있고. 이 많은 장점을 가로막고 있는 게 죄책감이라면, 인생이 너무 아깝잖아요.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는 게 아니라면, 먼저 시도해보고 언니의 삶이 아니라고 하면 그때 돌이켜도 늦지 않다고 생각하거든요."
이번에는 매미가 운다. 건너편의 고깃집 음악소리도 들려온다.
" 난 망할 거 같아서. 그게 두려워."
"그래. 망할 수도 있겠지. 그래서 처음엔 비교적 리스크가 없이 시작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시작해보잖아? 그러면 정말 아무것도 못하고 망하진 않을걸. 망하더라도 언니의 역사가 될걸. 제가 가방 만들어봤을 때 그랬어요. 직접 디자인 하고 업체 찾아다니면서 발로 뛰는 거 자체가, 뭐 떼돈을 버는 것도 아니고, 내 월급 투자해서 만드는 거지만, 얻어요. 어? 해보니까 진짜 되잖아? 이거 하나만으로도 인생이 풍요롭더라고."
긴긴 시간 층간으로 넘어오는 밖의 소음을 제외하고 우리에겐 말이 없었다. 이렇게 불확실한 인생을 이야기하는 대화 자체도 불확실한 면이 없잖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