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윤지영 Feb 11. 2016

상실감에 대하여

To. 지금 이 순간도 상실을 겪을 누군가에게



살면서 우리는 사랑하는 대상과 큰 이별, 작은 이별을 하게 된다. 누구나 최초의 이별은 엄마의 자궁과 안녕하는 거였겠지만. (이건 아주 큰 이별이다. 다음 세계로 가기 위한 이별이니. )



내가 기억하는 겪은 최초의 작은 이별은, 떨어져서 터져버린 계란이었다. 초등학교 1학년, 엄마가 집에 없던 평일 낮이었을 꺼다. 계란으로 후라이를 해먹으려고 했다. 계란바구니와 가스레인지의 거리는 세발자국도 안되었는데 고사리 같은 손으로 운반하던 계란은 프라이팬이 아닌 바닥으로 불시착했다. 어떤 스텝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터져버린 계란을 보고 있자니 허무가 몰려왔다. 계획대로 뱃속으로 들어간 계란과, 예고 없이 바닥으로 추락해 깨진 계란은 전혀 다른 감정을 유발한다. 전자는 배부른 만족감이고 후자는 어이없는 상실이다.


최초의 큰 이별은 중학교 1학년 때 겪었다. 외삼촌이 돌아가셨다. 우연의 일치인지는 몰라도 외삼촌이 뇌출혈로 돌아가시기 바로 일주일 전에 큰 이모의 아기가 태어났다. 가정의 달이라고 불리는 5월에 생명의 안녕은 그렇게 상반되는 두 시기, 탄생과 죽음으로 기억되었다. 나를 유난히 사랑해 새벽마다 울던 갓난아기인 나를 밤새 안고서 달랬다던 외삼촌의 죽음은 그렇게 새 생명의 탄생으로 적어도 나에게는 아름답게 기억되었다. 아, 삼촌이 우리에게 선물을 주고 간 거구나. 그런 마음으로 삼촌의 죽음을 추억한다. 아직도 말이다.


그 후에도 크고 작은 이별은 새로운 환경을 접하는 만큼 늘어갔다. 초중고 친구들과 이별했고 모래 날리는 학교 운동장과도 이별했으며 사랑하는 사람과도 깊고 진한 이별을 경험했다. 많이 아프기도, 담담하기도 했다. 이별 후 공허한 감정은 참을 수 없는 가벼움으로, 때로는 오랫동안 마음속 공백을 두었다.








어릴 때는 알지 못했던 이별의 진가. '상실감'은 이별 후 곧바로 수반되는 가장 슬픈 감정이다. 어느 날 기도를 하는데 나도 모르게 이런 기도가 나왔다. '하나님. 사람을 잊는다는 건 왜 이리 어려울까요.' 그냥 아는 사람, 밥 한번 먹자 하고 가벼운 인사를 남기는 사람들을 말하는 게 아니다. 절대적인 시간을 공유하며 같은 추억을 가진 사람들과의 이별은, 정말로 나를 상실감에 빠지게 한다. 선택한 이별이던 불가피한 이별이던, 기쁨의 이별이던 슬픈 이별이던 이별은 언제나 내 마음을 우울하게 만듦과 동시에 근원적인 진리를 툭 내려놓고 간다.


영원한 것은 없다고.







젊음이 영원하지 않음을 육체가 말하며 남녀의 에로스적 사랑이 영원하지 않음을 호르몬이 외친다. 이 땅의 거의 모든 것은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부패하며, 변질되고, 소멸한다. 인간 관계도 예외가 없다. 어쩌면 서로 아름다운 모습으로 기억될 때 헤어지는 것, 박수 칠 때 떠나는 것이 현명한 지도 모르겠다. 그랬던 이별이 훗날 잔상이 더 아름다운 경우도 분명 있으니까. 어찌 되었건 상실감은 마음을 허전하게 하며 길기도, 짧기도 한 공허를 동반한다.


하지만 상실의 연속이 나에게 가르친 교훈도 분명 있다. 이번에도 역시 누군가가 내 곁을 떠났다. 작은 이별이라 하기엔 그의 존재가 컸고 큰 이별이라고 하기엔 유난이었다. 속수무책으로 밀려오는 이별의 쓰나미 앞에서 이번엔 당하고만 있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헤어짐엔 예고가 없지만, 삶에 헤어짐이 필연적이라는  것쯤은 이제 안다. 앞으로도 수많은 이별이 있을 텐데 그때마다 수동적이고 싶지 않다는 마음가짐이 생겼다. 그 순간 퍼뜩하고 떠오른 깨달음은 '영원한 것이 없으니 현재에 충실할 것'이었다.








영원한 것이 없다는 진리는 현재에 충실해야 한다는 쓰고도 단 삶의 방식을 제공한다.

부모님의 존재가 영원하지 않다. 시간 또한 영원하지 않으며 계속될 거 같은 젊음에도 유효기간이 있다. 그래서 오늘 내게 주어진 하루를 최선을 다해 사는 것. 상실은 인간에게 당연해서 자만하게 되는 삶의 이치를 가르친다. 


또 하나, 상실의 이면을 통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이 있다. 상실은 평소에 우리가 꺼내볼 일이 없는 마음의 무게를 직면하게 한다. 이별하게 되는 대상을 사랑하는 만큼 우리는 더 큰 상실감을 경험한다. 함께 울고 웃으며 역사를 같이 했던 '내 사람'과 헤어지는 것은 데면데면했던 사람과 헤어지는 것과는 가늠할 수 없을 만큼 다른 내적 동요를 일으킨다. 상실감은 우리가 그 사람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깊이를 알 수 있게 하는 감정이기도 한 것이다.


상실의 이면을 본 나는, 더 이상 상실감에 허덕거리지 않게 되었다. 영원한 것이 없으니 현재에 충실하는 자세로 내 마음의 무게만큼 더욱 사랑하기로 했다. 아직 어떤 방식으로 사랑할지는 모르겠다. 표현할 수도 있고 그저 내 마음에 기릴 수도 있다. 이별에 유난히도 취약했던 나는 이렇게 상실을 통해 성장했다.








내일은 어떤 이별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나. 당신은 익숙한 곳에서 떠나는가. 아니면 사랑하는 누군가를 떠나보내야 하는가. 상실감이 몰려올 것이다. 당신은 상실에게 당할 것인가. 맞서서 무언가를 쟁취할 것인가.




From. 상실이 두려워 새로운 것을 만나지 못하는 어리석음에서 우리가 해방되기를, 상실의 관성 가운데 지배당하는 모두에게. 상실의 시대에 살고 있는 지영이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