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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하기 전, 글쓰기 전

그때가 더 행복한 거 같기도 하다.

by 윤지영



"알랭 드 보통은 말했어. 여행지에서도 물론 기쁘지만, 우리는 여행을 떠나기 전 설레는 마음으로 잠자리에 들 때나 여행지로 향하는 기차 안에서 더 행복하다고."


"맞는 말이야.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보다 여행을 계획하는 시간들이 더 뜻깊을 때가 있지. 떠나기 전날 기대감으로 쿵쾅거리는 밤엔 잠은 어찌나 안 오는지. 여행지까지 가는 교통수단에 실려있을 때에야말로 원하는 것에 도달하고 있다는 기대감 덕분에 최고조로 행복하지 않니. 내가 똑같은 일상에서 탈출한다, 바람을 맞이하고 자유를 들이킨다. 그 고요한 흥분."


"마찬가지로 글을 써야 한다는 열망과 오늘 밤은 글을 쓸 수 있겠다는 시간적 계산이 들어맞을 때, 샤워하고 나와서 보드라운 잠옷으로 갈아입은 뒤 경건하게 맥북을 켜는 그 순간이 가장 행복한 거야, 글쟁이인 나는. 그래서 나는 글을 쓰기 위한 일련의 전야제를 치르면서 여행을 준비할 때와 비슷한 고양감을 느껴."


"시간과 돈을 들이지 않아도 어디로 떠나는 것과 같은 행복이 주어진다는 건 너무 낭만적이다. 예전에 네가 그랬잖아. 글쓰기를 준비하는 시간이 가벼운 행복을 자주 가져다줘서 양질을 비교해봐도 글 쓴 후보다 글쓰기 전이 더 행복한 거 같다고."


"아직도 그래. 글쓰기 전에 행하는 경건한 예식은 1월부터 12월까지 달(month)의 요정들이 아름다운 옷을 입고 자신의 계절에 춤을 추던 그 동화책을 보며 그림보다 글을 쓴다는 것에 매력을 느낀 7살의 다짐이 깨어나는 거 같단 말이야. 기분이 들떠. 글을 쓰고 말 꺼라는 어린 나를 배반하지 않았다는 안도감이 들기도 하고. 그러다가도 어느 날 한 시간도 안되어 쓴 글이 생각 외로 잘 나왔던 날을 자꾸 회상하며 오늘은 그 정도 영감이 오질 않는다고 맥북 커버를 닫기도 하는 거지. 어제저녁에 읽은 책을 쓴 작가의 고뇌를 공감하며 글쟁이는 이럴 때도 있다고, 오늘은 내가 하루 종일 시달려서 의지가 나오질 않는다면서 뜨뜻한 이불 위로 몸을 누이는 날도 있어. 그렇게 육체에 굴복하는 척하며 고단한 정신을 위로하면 나는 내일 아침 새로운 희망을 품을 수 있는 거야. 어제는 내가 피곤했노라고, 대신 오늘은 집에 가서 혹은 단골 카페에 자리를 잡고 차근차근, 진심을 담은 글을 쓸 거라고. 그렇게 나는 나의 부족한 재능을 낙천적으로 회피하며, 느릿하게 살겠지."


"글쟁이라서 차분하게 말도 잘하네. 네가 좋아해 마지않는 알랭 드 보통을 인용해서 합리화하는 거 같기도 하지만 아무튼 나는 너를 응원해. 참. 여행보다 여행하기 전이 더 좋을 수 있다는 말, 알랭 드 보통이 어디서 말한 거야?"


"여행의 기술이라는 책에서. 너도 읽어봐. 빌려줄까?"


"아니야. 사서 볼게. 글쟁이들 돈 벌면서 살 수 있게 해줘야지. 물론 알랭 드 보통이 나보다 몇억 배 부자겠지만. 오늘 밤에도 글을 쓰니?"


"그럴 수도 있고, 여느 때처럼 글쓰기를 준비하다가 잘 수도 있고. 오늘도 맥북이나 노트를 펼쳐두고 막 글자 하나를 새기기 전에야 알 수 있을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