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을 떠나면 익숙한 많은 것들을 버리고 가야 한다.
유럽에서의 여정, 일수로 따지면 정확히 44일. 한달 반이라는 시간 동안 새로운 것을 마주하는 대신 익숙하고 소중했던 것들과 잠시 이별을 한다.
어렸을 적부터 한 동네에 오랫동안 살고, 전학을 한번도 가보지 않은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집을 떠나있는다는 건 참 낯설고 도전정신이 필요한 일이다.
변화를 두려워하고 현재에 안주하고 싶어하는 노예근성을 가진 나의 이면엔, 미지의 세계를 탐구하고 싶어하고 인간의 한계를 확장하는 것에 목말라하는 또다른 내가 존재한다. 유럽여행은 그래서 벌어진 일이다.
여행을 떠나기 전,
무의식적으로 "가기 싫다"고 내뱉고 나서 깜짝 놀라다가 그 말이 나의 진심임을 알았다.
사랑하는 사람들, 정겨운 장소들, 편안한 가족이 이 곳에 있는데
왜 굳이 그 곳에 가서
나는 어떤 것을 발견하려고 하는 것일까.
유럽으로 여행을 간다고 말하는 내게 주위 사람들은,
- 최근에 나도 국내로 여행을 갔었어. 내가 이번 여행에서 뭘 느끼지? 뭘 다짐할까, 뭘 배울수 있을까, 생각했는데 오히려 그게 마음에 짐이 되는거 같았어. 그래서 그냥 다 비우고 아무 생각없이 다녀왔거든. 근데 보이는 것들 느껴지는 것들이 더 많았어. 울산에 큰 배 만드는 조선소가 있는데 거기에 엄청 크게 <도전과 열정이 있는 회사> 이렇게 적혀있는거야. 정말 아무것도 아닌데 나는 그냥 청춘만이 열정있고 도전할 수 있고 하는건줄 알았는데 그런 열정이랑 도전은 누구한테나 제한없이 무한하게 다 존재하는구나 느꼈어. 유럽가면 길 걷는거 마저도 솜사탕 같겠다. 축복해. 사랑이야. 쭐쭐 굶어도 쭐쭐 굶지만은 않을거야. 재밌게 위험하게 다녀와.
- 가서 이상한 애들 쫓아가지말고. 가방 잘챙기고, 귀국날 까먹지말고, 모르면 사람들한테 물어보고, 삥뜯기지말고, 무섭게 생긴애들은 피하고. 어두운 뒷골목 가지말고. 야. 밤늦게 돌아다니지말고. 열한시까지다. 늦으면 손바닥 대.
- 언니 여행간다고 해서 선물 몇개 샀어요. 많이 걸어다니는 여행이니까 밤에 잘때 다리에 붙여요 이거. 이건 여행다니는 사람들이 엄청 좋아한대요. 잠잘때나 비행기에서 눈에 붙이는 마스크. 또 이건 언니가 한달 넘게 가니까 중간에 그날이 시작되면 배에 붙이면 돼요. 제가 간호일 하니까 무슨약이 필요할지 다 아는데, 상비약 챙겨주면 괜히 아파질까봐. 이런걸로 챙겼어요. 잘 다녀와요 언니.
- 눈이 오는 주일에 밤비행기 타고 제주도로 가던 날, '언니! 여행가는 복장 아닌거 알지?' 라고 네가 말했지. 맞아. 나 진짜 추웠어. 허허. 하지만.. 불편할수록 사진에 예쁘게 나와. 그러니 너도 한번쯤은 시도해보길 추천해. 남는건 사진뿐이야 지영아. 하~ 부럽다 니가.
- 원래 여행은 고생해야 참맛이다. 그게 더 기억나. 유명한거보다 길 한번 헤메다 거기서 본 풍경, 길거리 음식 이게 더 기억남. 너무 걱정말고 조심만 하고 여권 잘 챙기고 나머지는 즐기고 와. 너 일정에 옷 10벌이면 충분해.
- 지영아. 여권 사본 챙겼어? 복사본. 잘 챙겨가. 걱정되네. 얇은 옷 안에 입을것도 챙기고. 그리고 스카프. 체력전이다. 크크. 신발 야물딱진거 신고! 나 정말 케즈 하루 신고 디지는줄. 기대할께!
- 언니. 언니가 고2땐가 고3때인가 한달 정도? 이모네 가서 살았던 때 있잖아. 나 그때 기억이 없다? 최근에 엄마랑 얘기하는데 언니가 고등학교때 한달 정도 집에 없었다는 거야. 그래서 기억을 되살려보는데, 언니가 없었던 시절은 기억이 안나는데, 언니가 집에 돌아왔을때 내가 엄청 반가워했던 건 기억이 나. 신기하지. 이번에 언니가 없는 시간도 나중에 기억이 안나는거 아니야?
라고 말해주었다. 사랑이 아니면 할 수 없는 말들.
여행을 가기 전, 난 이미 발견했다.
사랑하는 사람들과 대화하고 싶을 때 마음껏 대화하는 것, 아침에 옷장에서 입고 싶은 옷을 마구 입어보다가 결국에 하나를 선택하는 자유로움, 낯선 곳에서 길을 물어볼 때 모국어로 서슴없이 물어볼 수 있는 편안함 등, 너무나 익숙하여 미처 소중히 여기지 못했던 것들을.
여행을 떠나기 전,
여행은 떠나기 전엔 절대 알 수 없는 익숙한 것들의 소중함을 알게 해준다.
그걸 알고 떠나서 다행이다. 그리워할 기억들을 안고 떠나게 되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