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린 그림

그림 그리는 여행

by 윤지영



편편한 바닥이 있는 어딘가에 자리를 잡는다. 그곳이 호스텔의 테이블이건, 카페이건, 고즈넉한 여행지의 길거리이건 상관없다. 공간이 확보되면 오늘 봤던 것 중에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을 떠올린다. 이미지의 군더더기를 제외시키고 머릿속으로 구도를 잡은 다음 하얀 종이 위로 스케치와 색칠을 동시에 한다. 스위스에서는 기차에서 몇 개의 그림을 그렸다.


여행지에서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쉽지 않다. 울퉁불퉁한 그림을 그리는 나는 더욱 그렇다. 캐리어를 싸면서 물감과 오일파스텔, 마카까지 꾸역꾸역 눌러 담을 때는 뭐든지 가능할 거라 생각했는데, 확실히 녹록지 않다.


수준 높은 그림이 아닌데 이걸 쳐다보는 외국인의 시선을 견뎌야 하고, 창작이 고갈되는 불온한 순간들도 온전히 나의 몫이다. 삐끗하고 어긋난 라인도 내 탓이고, 조화롭지 못한 배열과 그보다 더 이상한 색상 선택도 모두 나의 책임이다.


그러나 나는 그림 그리는 것이 좋다.


유럽의 정상, 융프라우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라는 책에서 주인공 다자키 쓰쿠루는 수영을 한다. 처음엔 물속을 나아가기 위해 운동 리듬을 타며 팔다리에 동력을 가하다, 어느 순간 온몸의 흐름이 자동적으로 되는 시점이 오면 그때부터는 사색을 한다고 했다. 수영을 하면서 사색하는 것. 나에게는 그림이 곧 수영이 되어주었다.


기차 바깥의 풍경이 1분 1초 절경인 스위스에서 어쩌면 그림 그리는 행위는 유난스러울지도 모른다. 투명한 호수, 그림 같은 산에서 눈을 떼고 흰 켄트지를 보고 있자니 암담하기도 했다. 어떻게 그려도 스위스의 자연을 그대로 그리지 못하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기를 내 그림을 그리다 보면 어느새 그림은 손이 자동적으로 그리고 있고 나는 사색한다. 내가 그림을 그리면서 얻는 만족은 뭘까. 나는 이 여행에서 그림을 그림으로써 무엇을 남기려고 하는 걸까. 스위스의 자연은 누가 봐도 아름답지만 나의 그림엔 나만의 스위스가 있다. 사진과는 또 다른 매력, 선 하나하나 힘을 다해 그리는 그림은 정말로 여행을 더 풍성하게 도와준다.


나의 만족, 나의 그림.

여행을 거듭할수록 점점 느려지는 그림 속도는 조금 더 일상적이고, 편안한 장면을 토해낸다. 다른 색보다 확연하게 빨리 닳아 없어지는 초록색을 보면서 예쁘다고 생각이 든다. 그리고 스위스의 기차는, 그림 그리기에 정말 좋은 화실이다.


61760027.JPG 이렇게 기차안에서 그림과 글을 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