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티태스킹의 채찍질
"성장하는 인간은 필연적으로 넓은 세상으로 나오게 되잖아. 이제 시시콜콜하게 동네 놀이터에 앉아 이야기하는 여유로운 때는 지나갔고. 나는 더 많은 사람, 더 빨리 변하는 환경에 발맞춰 적응해야 해. 도서관에서 공부하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어."
그녀는 대학원에서 음악치료를 공부하고 있다. 옆구리에 낀 두꺼운 전공서적이 들어온다. 다소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이어나간다.
"개개인이 각자의 분야에서 쌓아온 경력이 있을 텐데 내가 그걸 인정 안 하는 인색한 사람이더라고. 타인은 수월하게 문제 해결을 하는 거 같은데 내가 잘 안되면 화가 나고. 나는 현장에는 능하지만 이론엔 약한 게 있단 말이야. 근데 대학 4년 동안 이론만 배웠던 사람에겐 내가 다가갈 수 없는 지식의 벽이 높게 쌓여있었어. 불평했지. 나에겐 이론을 중점적으로 배울 기회는 없었다, 나도 잘 하고 싶다, 그런 생각들이 복합적으로 드는 거야. 그러다가 문득, 그 사람들이 했던 수고는 생각하지 않는 내 모습을 보게 되었어. 교만하더라."
"그러게. 그 사람들이 4년 동안 이론 지식을 습득했을 때 넌 현장에서 헤엄쳤잖아. 각자의 상대적인 시간이 있고 색깔이 있는데 너가 다방면에서 보다 더 잘하고 싶었나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투자하지 않고도 잘하고 싶었어. 4년 배운 애들처럼 한 번에 착- 안되면 낙담하고. 나한테 그런 모습이 있더라. 노력의 시간은 진실만을 말하는데 난 무작정 빨리 잘하고 싶었던 거야."
"너만 그런 게 아니고 우리 모두 그래. 그 사람의 훈련의 시간은 별 게 아니라고 생각되지. 우린 타인의 인생을 살아보지 않았으니까. 겪어보지 않으면 몰라. 저 사람의 유연성과, 또 이 사람의 차분함이 어떤 인고를 거쳤는지도 모르면서 결과만 가지고 싶어 해. 괜히 그 스킬이 나오는 게 아닌데… 그래서 진짜 전문가는, 자기 스스로를 전문가라고 말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하잖아. 그게 무슨 말인지 조금은 알 꺼 같아."
"응. 그게 내공인 거 같아. 우리가 아무리 똑똑하다해도 연륜이 주는 겸손함, 세월에 맞선 삶의 흔적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지. 아- 다시 마음 고쳐먹어야지. 타인의 장점과 스킬을 인정하고 내면부터 돌아보는 연습을 해야겠어."
"그것보다 중요한 거. 정당하게 배우고 겸손하는 거. 그거 만 있으면 조금 느려도 괜찮다고 생각해. 어차피 사람이 가진 능력은 제각각이야. 모든 걸 잘할 수는 없고. 박지성 선수가 축구를 잘하지만 프로그래밍도 잘하고 미용사처럼 머리를 잘 만질 순 없는 거야. 그냥 내가 잘 할 수 있는 하나를 믿고 계속 배우는 것. 장인은 그렇게 탄생되더라고. 빠르게 더 빠르게 모든 것을 완벽히 잘 해내는 것을 요구하는 요즘 시대가 사실은 모순인거지. 멀티태스킹(multitasking)은 사실 컴퓨터가 발명되면서 나온 용어래. 컴퓨터가 동시에 여러 일을 잘 하는 것처럼 보이니까 작업 속도의 효율화를 위해 쓰이기 시작된 단어인데 이걸 인간한테 요구하니까 문제인 거야. 사실 컴퓨터가 일을 처리하는 속도가 매우 빨라서 동시에 여러 일을 하는 것처럼 보이는 거지, 걔도 한 번에 하나의 과제밖에 처리하지 못하거든. 하물며 인간은 더 그렇지. 사고하고 갈등하는 존재니까. 나는 너가 가진 달란트의 힘을 믿어. 잘할 거야. 요즘 시대의 가치관, 더 빠르게 더 많이 잘하라는 채찍질에 함몰되지 말고 천천히 잘 살자."
그녀의 전공서적 위로 쌓여있는 잘해야 한다는 압박의 무게가 보인다. 많은 지식을 습득하는 만큼 많은 고뇌가 그녀를 괴롭힐 텐데 오늘 밤은 평안하게 잘 수 있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