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하는 삶에 대하여
하얀 종이 냄새가 나는 새 노트 첫장에 글을 쓰는 건 망설여진다.
순백의 깨끗함을 더럽히기 싫어 날 것 그대로 고결하게 남기고 싶다는 마음이 있다.
그 심정을 무릅쓰고 펜을 꾹 꾹 눌러가며 한 장 한 장 흔적을 남기다 보면,
이미 절반이 훌쩍 넘어간, 어느새 글씨가 강북의 좁은 골목길마냥 흐트러지며 나름의 결을 새기고 있다.
고까운 자태는 어디 갔냐는 듯, 나와 함께 한 희로애락의 채취가 묻자 새 노트는 역사가 되었다.
모두의 것이 될 수 있는 새 것보다 가방에서 이리저리 굴러 생채기가 나고 헐거워져도 나만의 것.
나의 냄새가 나는 온전한 나만의 것.
인생 또한 그렇지 아니한가.
할머니들이 불쌍했다.
그들에게도 인생의 전반전에는 하얗고 고운 손과 반질한 이마가 있었을 것이다.
굽은 등과 노쇠한 근육으로 느리게 사는 삶이란 감히 20대인 나는 상상조차 안되는 막연한 미래다.
그러나 그들은 말한다.
무지했던 젊음보다 지혜로운 늙은이를 택하겠노라고,
순진한 처녀보다 상처와 고독을 증명하며 품어낸 지금이 더욱 풍요롭다고.
은발의 곱게 늙은 여인은 그저 늙어가는 인간이 아니며
수백억의 복잡 미묘한 감정을 담은 작은 수필이자 한 세기가 기록된 저장고이기 때문이다.
그러하기에 오늘도 나는 기록을 한다.
나의 새 노트에, 나의 영혼과, 나의 정신에.
훗날 보다 풍요로운 안녕을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