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소녀
일본군에 의해 강제로 끌려온 영애(김새론)와 종분(김향기). 똑같은 고통에 처해도 둘의 자세는 다르다.
끼니를 때우는 것이 중요할 만큼 가난했던 종분은 절망스러운 상황에서도 자신에게 주어진 공간을 닦으며 삶에 순응한다. 어르고 달래며 때로는 때려서라도 영애를 지킨다. 엄마가 자신에게 그랬던 것처럼.
영애는 저항정신을 가진다. 열심히 공부해 1등을 도맡아 하던 그 올곧은 자세로 지옥에서 벗어나려고 싸우고, 도망친다. 그러나 죽음조차 스스로 선택할 수 없는 인생이란 것을 알고서는 차츰 그곳에서의 시간을 살아낸다. 종분에게 소공녀를 읽어주면서, 일본군의 매질에서 종분을 지키며.
의지할 곳 하나 없는 시간 속에서 종분과 영애는 친구로, 때로는 서로의 엄마가 되어주며 산다.
엄마가 기다리랬는데.
말도 못 하고 와서 날 찾을 건데
...
소녀의 감수성, 여성의 순결성, 나아가 인권까지 영애와 종분에게는 지켜진 것이 없다. 일본의 지배가 그녀들의 소녀시절까지 박탈했다. 하얀 눈처럼 소녀들은 여전히 순결하지만, 더 이상 목화만큼 따뜻할 수는 없다.
지금은 이십 대 후반의 여성이지만, 나도 한 때 소녀의 육체였던 시절이 있었다. 나이가 들어 몸이 자라고 성숙해지면 소녀의 감성과 이성도 같이 자란다. 그러나 여인이 되고 노인이 된다 해도 나는 소녀감성을 간직할 거 같다. 작은 것에 두근거리고 괜히 코끝이 찡한 그런 감성 말이다.
오랜 세월을 산 종분(김영옥)도 그런 거 같다. 검은 머리에서 흰머리로 변한 것만 빼고는 단발머리 스타일도 그대로다. 종분은 단정하게 머리를 빗고 예쁜 핀을 꼽는다. 그 모습이 소녀와도 같다. 자신과는 다르게 여전히 그때 그 모습으로 찾아오는 영애와 한두 마디 툭툭 던지는 모습에서도 종분의 소녀성이 보인다.
종분은 다시 소녀를 만난다. 불량하지만 어딘가 모르게 자신들의 소녀시절을 닮은 옆집 은수(조수향)를. 종분은 은수를 지킨다. 그 모습이 어린 시절 지켜내지 못했던 영애를 지키는 것처럼 한결같다.
종분은 부끄럽다. 위안부에서 있었던 일들이 부끄럽고, 영애를 눈길에 두고 온 것이 부끄럽고, 영애의 이름을 써서 받은 돈이 부끄럽다. 그 말을 들은 은수가 ‘그거 부끄러운 거 아니야.’라고 말한다. 종분은 은수를 위로하고 은수도 종분을 위로한다. 그렇게 그들은 서로를 의지하며 새로운 인생을 산다. 은수는 다시 교복을 입고 학생의 자리에 돌아간다. 영애의 인생을 살던 종분은, 영애의 사망신고를 하며 이제 종분으로서의 삶을 산다.
인생이 좀 그렇다. 용서를 구해야 할 자들이 도리어 뻔뻔할 때가 많고, 사과받아야 할 대상이 고개를 돌리는 경우가 태반이다. 상처는 상처를 낳는다. 그러나 상처 입은 자가 상처 입은 자를 돕고, 그자가 또 다른 자를 돕고, 그렇게 치유하고, 회복시켜주며 살아가는 것 또한 인생의 아이러니다.
우리 집에서 십분 정도 걸으면 수유역이 나온다. 수유리는 밤이면 네온사인이 반짝반짝 거리는 유흥가로 유명하다. 그곳에서 한 블록 정도 걷다 보면 청동으로 만들어진 소녀상이 있다. 종로나 공원 등 인적이 많은 곳에만 있는 줄 알았는데 우리 동네에도 세워져 있었다. 겨우내 소녀는 시민들이 손수 뜬 털신과 털 망토를 두르고 그곳에 머물러 있다. 몇 밤만 지나면, 눈길이 지나가고 소녀 앞으로 곧 봄길이 올 것이다. 외롭고 깜깜한 밤도 잘 버텨주었으면. 소녀의 마음을 간직하고 있는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잊지 않는 것. 기억하는 것. 그리고 이렇게 글을 쓰는 것 밖에는 없는 거 같아서 부끄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