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엔 무조건 좋은 일도, 무조건 나쁜 일은 존재하지 않는다.
시골에서의 학교 생활은 초반엔 어려웠으나, 그것이 내 삶에 또 좋은 일로 남아있다.
영화관도 없던 곳에서 초등 고학년과 중학교를 나왔다. 그래서 명절 특선 영화를 볼 때마다 재밌었다. 매주 일요일, 비디오속으로에 보면 영화 개봉일이랑, TV에서 영화틀어주는 시기랑 왜이렇게 시간차가 크지? 이런 궁금증을 가져보기도 했다. 영화관을 본 적이 없었으니까.
초등학생 때 전학 후에는 좀 힘들었다. 스트레스로 방학 때는 집에만 있었으며, 폭식으로 인해 엄청 뚱뚱한 초등학교 6학년이 되었다.
그러나 중학교 입학 후 친구들이 바뀌고, 밝은 친구들이 많은 반에 배정을 받았다.
1학년 3반. 아직도 기억난다. 주말이 심심할 정도로 학교 생활을 즐겁게 했다. 난로불에 고구마 구워먹다가 혼나고, 놀이터에서 중학생 남녀가 낄낄거리며 놀기도 했다. 학교에 있는 농구부 친구들 응원도 다니고, 슬램덩크 만화책도 읽으며 농구부 매니저의 여학생 역할이 나인가? 상상하며 대입해보기도 했다.
아버지 사업에 큰 위기를 맞고 선택한 비평준화 고등학교도 나에겐 천운이 따른 선택이었다고 본다.
아직도 여고친구들과 잘 지내며, 그때 만난 친구들 모두가 대기업을 갔거나, 행복한 가정을 유지하고 있는 등, 정신들이 건강한 친구들이 죽마고우로 자리매김 되었다.
고등학교를 스스로 선택 할 수 있게 믿어준 부모님이 계셨다 그 덕에 내가 선택한 학교에서 몸과 마음이 건강한 친구들과 평생 우정을 맺을 수 있게 된 계기가 되었다.
그렇게 나는 지방국립대학교를 장학금을 받고 입학할 수 있게 되었다. 지방 국립대 조차도, 우리집안 사정을 생각해서 선택한 것 이었다. 그리고 비평준화 여고에서 중간성적만 가도 많은 친구들이 가는 곳이 었기에 무난했다.
대학생이 되고나니, 교복이 없어졌다. 각자 가진 돈에 따라 먹는 것, 입는 것, 사는 것, 타는 것 이 눈에 보였다. 고3때 무너진 집은 여전히 어려웠다. 그렇게 나는 첫 학기 부터 장학금을 제외한 금액의 학자금대출과 생활비 까지 합쳐서 학자금 대출을 받았다. 국립대학교가 학비가 저렴하니, 학자금 대출도 사립보다는 훨씬 더 절약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대출을 받고 생활했다.
그래서 나는 대학시절이 마냥 즐겁지는 않았다. 공대 여자로서 대우 받을 수 있었지만, 즐겁게 술마시고 놀고 연애하면서도 마음 한켠에는 항상 무거운 돌 한덩이가 있었다. 그때 아버지는 편의점 야간 알바를 뛰며, 나의 월세를 내어주셨다. 그것을 아는 나는, 방학 때 집에 내려가지 못하고 알바를 하기 시작했다. 가끔 내려가는 본가에는 사춘기 때 받은 스트레스가 상처와 삶의 억울함으로 자리한 남동생과 아빠가 늘 대립했다. 집안 분위기가 너무 좋지 않아, 본가에만 다녀가면 그렇게 눈물이 났다. 답이 없어 보이는 우리집 때문이었다.
우리집 같은 가정 환경이면 나는 시집도 못 가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이 부분이 남자를 만날 때의 나의 자존감을 갉아먹었다. 가진 것도 없는데 매일 같이 살얼음판인 우리 집. 돈이 없으면, 마음의 여유가 없어진다. 그렇게 가족의 화목이 깨진다는 것을 나는 뼈저리게 지켜보며 살았다. 그게 또 자식들에게는 가난을 물려주기도 한다. 가난한 마음.
바로 이것이 가장 무서운 포인트였다.
‘직장을 바로 가져도 우리집 가난은 못 벗어날 거야’
‘이렇게 공부해서 뭐하나, 이렇게 저축해서 뭐하나’
= 막 살게 될 확률이 높아진다.
‘가정이 화목하지 않으니, 내가 연애를 해도 결혼 상대가 나타나면 다 도망갈 걸’
= 연애할 때 서로 같은 위치가 아니라 내가 스스로 을이 되려고 한다. 무조건 상대에 맞춰주는 연애가 된다.
‘집에서 떨어져서 내가 꾸린 삶은 즐거운데, 본가가 불행하니 너무 슬프다. 내가 해결할 방법은 없을까? 정말 부자가 되어야 하는데 부자가 되긴 글렀고’
= 스스로 유리천장을 짓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