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망성쇠 가족
초등학교 고학년이 갈 수록 김관장의 사업도 술술 풀렸다. 동네에서 가장 큰 태권도장과 사범 2명, 시골에서 스쿨버스로 아이들을 실어나를 정도가 되었다.
상가 2층엔 태권도장, 3층에 어린이집을 운영했다. 3층에서 엄마가 선생님으로 함께 일을 도왔다. 그렇게 상가 건물 한층 한층을 아빠가 섭렵해나갔다.
그러다가 내가 중학교 3학년 때 였다.
그렇게도 현관문 단속을 잘 하며 살았음에도, 우리 집에 어마무시한 위기가 들이닥쳤다.
안 좋은 일은 한꺼번에 온다고 했던가?
사범이 스쿨버스를 운전하다가 원생을 치는 사고를 냈고, 그 아이는 결국 세상을 떠났다.
대표로서 아빠는 모든 책임을 물었다.
게다가 그 시기에, 아빠가 서줬던 친구의 보증이…아빠에게 함께 날아왔다.
고등학교가 없던 시골이었다. 공고나 상고가 있었다.
불행 중 다행으로 나는 공부머리가 있었는지, 시골친구들이 공부를 안 한건지 전교 10등은 항상 유지를 해왔다. 그덕에 도시에 있는 고등학교를 선택해서 인문계로 나갔어야 했다.
또한 우리 엄마아빠는 교육관과 정치색 하나는 둘이 잘 맞는다.
부모의 교육관 ‘너의 인생은 니가 알아서’.
풍족하지 못했기에 그런말을 할 수 밖에 없었을 터.
그래도 우리 부모는 나에게 성적표 한번 가져오란 소리를 단 한 번도 하지 않으셨다.
고등학교조차 어디로 갈지 정하라고 했다. 내가 정하는 곳으로 가족이 이사를 가겠다고 했다. 그리고 아빠는 차를 몰고 함께 고등학교를 투어했다. 마음 속에 끌리는 고등학교가 있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나 때문에 이사한다는 것이 부담이었다. 우리집이 어려운 상황인 것도 알았다. 아빠가 출퇴근이 가능 한 지역에 있는 비평준화 학교를 선택했다.
상대적으로 비평준화 학교가 더 작은 도시였기에 집도 비싸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 같다.
결과론 적으로 이때 내가 끌리는 학교 보다, 우리 부모를 생각해서 선택했던 그 학교가 나에게는 인생 첫 번째의 큰 행운으로 작용할 지는 꿈에도 몰랐다.
우리 가족은 이사를 했고, 예상 외로 아빠 김관장은 출퇴근이 아니라 아예 태권도장을 새로 열었다.
좀 커서 들어보니, 그 사고도 그랬고 동네에서는 접을 수 밖에 없다고 하셨다.
내가 고등학생이 되는 사이 우리아빠는 이제 중년이 되었다. 이 전 동네에서 아빠의 태권도장은 으뜸이었다. 그러나 본인 의지와 상관 없이 도시로 내몰렸고, 조금 더 큰 도시에는 조금 더 젊고 쌩쌩한 관장 들이 이미 체육관을 운영하고 있었다.
그래도 처음 이사 왔을 때에는 아파트에 살았다. 고등학교 3학년 올라가는 시기에 우리는 주공 연립 월세로 옮겨야만 했다. 18평에 가족 4명이 살았고, 방도 2개뿐이었다.
수험생인 나에게 안방을, 부모는 거실을 방으로썼다. 방음하나 되지 않는 곳에서 남동생은 사춘기 시기를 이곳에서 버텼다.
그렇게 엄마도 일터에 나가 일을 하시기 시작했다.
그렇게 우리는 각자 위치에서 조금 더 불행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