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근히 가난한 집

이사만 10번

by 암튼



30대가 되어 아파트 투자를 했다. 아파트를 매수 매도 할 때 초본서류를 뗄 일이 있었다.

고등학생 때 까지 포함하면 이사만 10번을 했던 나의기록이 고스란히 초본에 담겨있었다.


나의 아버지는 사업가였다. 엄밀히 말하면 태권도 관장님.

서울에서 시작해, 엄마를 만났고 결혼 했고, 아이가 태어났다.

점점 더 아빠의 고향쪽에서 사업을 하고자했던 아빠와 달리, 엄마는 엄마의 고향 경기도 밖을 떠나기 싫어했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 잠시 우리는 구리시에 살고 아빠는 충청도에서 태권도장을 먼저 내려가 운영을 했었다. 함께 충청도로 내려와주지 않은 엄마에게 원망이 쌓였다. 아빠는 매주 주말마다, 만취 된 상태로 우리집 현관문을 줄기차게 두드려댔다. 정확히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엄마한테 숨겨둔 돈이 있는지 계속해서 의심하고 추궁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 때 우리가족의 불화는 첫번 째 최고봉을 맞았다.

더 어렸던 연년생의 남동생은 심리적으로 불안함까지 왔었는지, 낮잠만 자고 일어나면 10분이상을 꿈에 취한 사람처럼 성질 내고 울고 떼를 쓰는 습관이 있었다. 나중에 커서 물어보니, 그때마다 도깨비가 우리집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려고 했고, 엄마랑 누나랑 본인 셋이 힘을 모아 힘겹게 문을 닫았다고 했다.

그 도깨비 혹은 괴물이 바로 우리 아빠였을 터.


사실 그 도깨비는 아빠가 아니라 가난이라는 그림자였을 것이다.


집에 네 가족이 맘 편히 먹고 살만한 돈이 없다보니, 사는게 팍팍해지고 마음도 팍팍해져갔다.

초등학교 3학년 2학기, 결국 엄마는 아빠를 따라 우리를 데리고 충청도 시골 무극리 라는 곳으로 이사를 갔다. 가뜩이나 내성적이었던 나는 충청도 시골에 내려가 내성의 끝판을 보게 되었다. 충청도 적응기가 마무리 될 떄 쯔음에는 아빠의 사업도 자리가 잡혀가고 있었다.

그래서 바로 우리가족이 화목해졌냐고?

그것은 아니었다. 사업이 흥하면서 아빠의 기세도 함께 흥하였으며, 이제와서 보니 그는 최고봉에 있었을 때 가장 거만했다. 인맥 관리를 위해 매일같이 취해서 들어왔으며, 우리 가정보다는 본인의 불쌍한 어머니, 나의 친할머니를 챙겨주려고 엄마에게 거짓말도 하였다.

그렇다고 엄마에게 넉넉한 생활비를 제대로 준 적도 몇 번 없었다.

그리고 본인이 힘들 때 엄마가 숨겨둔 돈이 있는 것 ‘같은데’ 도와주지 않았다고, 나의 친할머니와, 막내삼촌, 고모들에게 뒷담화를 했다. 여리고 당하기만 했을 성격의 엄마는 강단있게도 시댁에 아예 가지 않는 며느리로 확실히 선을 그어버렸다.

가난하고 팍팍하게 자라난 우리 아빠 김관장은 마음도 가난했던 사람이었다.

사업가 아버지가 그래도 사업을 잘 운영하고 있었으나, 맏이와 둘째 아들 교육 잘못시킨 탓에 사업이 망해 갔다. 넷째 아들이었던 학생 김관장은, 어느 날 갑자기 아버지가 사라졌다.

군대 전역하고 보니 집이 없어져있던 청년 김관장. 끝끝내 6남매를 어렵사리 키워낸 엄마만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이었던 효자 김관장. 본인이 일어서서 가족들을 책임지고 싶었던 꿈많은 남자 김관장.

대감집 딸은 아니어도 부농의 딸이었던 우리 엄마 정여사. 부모가 농사일에 너무나도 바빠서 따스하거나 세련된 케어 한번 받지 못했지만, 마음만은 부자였던 학생 정여사.

무리하게 벌려가시면서 구두쇠처럼 일 하던 아버지를 뒷바라지 하며, 6남매도 키우셨던 엄마는 결국 정여사가 성인이 되기 전에 돌아가셨다.

친정엄마는 없어도, 여태 자라왔듯이 부족하지 않게 평생 잘 먹고 살 거라는 느낌이 있었던 정여사. 나이가 들면 부자가 저절로 되어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정여사.

그러나 그녀의 삶은 그렇지 못했다. 엄마가 유일하게 고를 수 있는 가족, ‘남편’을 고르는 순간부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