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짜부자행세

빚 청산은 점점 더 멀어져 갔다.

by 암튼



23살에 대기업 입사를 했다.

우리 팀의 임원이셨던 팀장님도 나의 본가 도시 이름을 듣더니 ‘느그 동네에 플래카드 걸려야 하는거 아니가?’ 라고 농담을 하셨다. 맞는 말이기에 나도 함께 웃어버렸다. 그 덕에 나는 스스로 나의 성취감을 맛보고 있었다.

그러나 가난 DNA라고 해야할까. 어렸을 적 돈이 부족하면서 느꼈던 결핍의 보상심리가 작동했다.

저축 0원. 오직 학자금대출 원리금 상환과 대출이자 빼고는 모두 내가 썼다.

월급이 들어온 통장의 체크카드를 들고, 백화점을 갔다. MCM 매장. 그때 당시 나에게 명품의 기준은 이 곳이었다. 아니 내가 당당하게 들어갈 수 있는 심리장벽의 최고가 MCM 매장이었다. 그곳에서 큰 가방 하나를 집어들었다. 70만원 대의 가방이었다. 점원은 잘 한 선택이라며, 나를 계산대로 안내했고, 물었다.

“몇 개월 해드릴까요?”

내가 말했다.

“체크카드입니다.”

이 말 한마디로 나의 자존감, 우월함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점원이 나를 보고 이런 생각을 하겠지?

‘어머, 체크카드로 즉 현금으로 바로 가방을 사는 젊은 여자애네. 부잣집 딸인가?’ 라고 말이다.

그 날 하루 종일 기분이 좋았다.

우리 엄마는 70만원으로 한 달 생활비로 쓰는 분이신데, 그 집안 장녀인 나는 백화점 가서 가짜부자 행세를 하며 혼자 키득거리고 있었다.


나와 아주 비슷한 시기에 다른 대기업에 들어간 여고 동창이 있었다. 별명은 비바스타. 비바스타와 나는 근무 하는 도시도 충청도로 비슷했고, 돈 벌이도 비슷했다. 게다가 고등학교 때에는 둘다 이과생이지만 그림이나 글 쓰는 것을 좋아하는 학생이었다. 나름 예술 쪽에 관심이 한 번 씩 있던 K 장녀들이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었다. 2009년 가을, 2010년 정식 입사를 확정받은 우리는 처음으로 둘이서 제주도 여행을 떠나봤다. 나의 인생 첫 비행기였다.

그것을 빌미로 우리는 약 7년 간 매년 미친해외여행을 시작했다.

동유럽,프랑스,스위스,LA,스페인,독일 남부, 제주도는 매년 2회 씩 갔었다.

파리 샹제리제 거리에서 샤넬 매장에서 나는 지갑을, 친구는 백을 샀다.

드넓은 세상에 나가 낯선 환경속에서 계획대로 모든게 진행 되지 않는 것, 바로 여행을 통해 삶을 서서히 배워나갔다. 그나마 다행이었다. 한인민박에서 과음으로 다음날 여행을 못하게 되거나, 거기서 눈이 맞아 헛짓거리 하고 다니는 여성들은 아니었기에 말이다. 가더라도 항상 투어를 통해 그 나라의 박물관, 미술관을 다니며 취향을 넓혔고 그 곳에서 새로운 사람들을 잠깐 스치듯 지나보내는 일들을 반복했다.

나는 여전히 소비중독에 빠져있었기 때문에, 저축을 병행하던 비바스타와는 달랐다. 비바스타는 저축을 해서 첫 차를 구매했고, 나는 첫 신용대출을 통해 첫 차를 질러버렸다. 스위스를 갈 때 쯔음에는 마이나스통장 500만원을 뚫어서 여행을 갔고, 그 마이나스 통장의 500만원 조차 나의 월급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 마이나스 500만원은 1년 넘도록 나와 함께 했다.

그렇게 빚을 갚고, 희망을 세울 시기에 나는 소비중독과 여행중독에 빠졌다.

비바스타와 지금도 이야기를 나눈다.

우리의 찬란했던 그 시기는, 후회 스러우면서도 또 절대 후회되지 않는 순간이었다고.

지금우리는 마흔을 앞두고 있고, 다들 늦깎이 결혼을 했고, 나는 출산도 했다.

지금 이 시점에 그때를 돌아보면 이런 생각이 든다. 그때 돈을 써봤기 때문에 그것이 얼마나 황망한 것인지 지금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기에 진짜 나를 위한 소비가 무엇인지 잘 알게 되었다. 그래서 SNS나 유행템에 쉽게 유혹당하지 않는 힘이 생겼다. 또 그 젊은 패기였떤 그때에만 해볼 수 있었던 것들이라고 생각이 든다. 지금은 맘먹고 하기가 너무나도 어려워진 것들이기 때문이다.

소비 중독/ 여행 중독. 무어든 중독은 좋지 않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는 경험을 하고 그 안에서 배울점과 복기할 점을 생각해보고 앞으로 나아가는 이 삶의 방식이 지금의 나를 만들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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