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냉전 피하기

현직 방송작가의 살아남는 법에 대한 이야기

by NOP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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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노파입니다

방송작가는 피디가 아무리 열받게 해도 웃으며 넘기는 게 좋습니다. 그는 정규직이고 나는 프리랜서이기 때문입니다. 정규직 피디는 작가보다 백살이 어려도 작가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습니다. 그래서 프리랜서들은 언제나 피디가 보이는 쪽 눈으로는 웃고 안 보이는 쪽 눈으로는 웁니다. ^_ㅠ


하지만 피디들은 인상을 쓰고 싶을 때 언제든지 인상을 써도 됩니다. 이것이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가장 큰 차이입니다. 회사에서 인상을 쓸 수 있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이 공간에서 누구에게 권력이 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작가의 목줄을 쥐고 있는 피디 상감마마와의 냉전은 가능한 피하는 것이 이 바닥 프로의 자세인데, 저는 요즘 피디와 냉전 중입니다. 제가 아마추어라는 뜻입니다.



1. 라디오 피디와 작가의 냉전 현장

라디오 부스에 들어가면 맨 왼쪽에 작가 모니터가 있고 가운데엔 피디 모니터, 그리고 우측에 음향 감독님의 우주선 계기보드판 같은 멋진 음향 기기가 있습니다.


image_readtop_2017_124748_14877291962786076.jpg 가수 신지훈이 2017년 자기 인스타에 올린 SBS 라디오 부스 사진


온에어에 불이 들어오면 보통은 작가와 피디가 딱 붙어 앉아서 유리판 너머로 출연자들이 원고대로 잘 하고 있는지, 청취자 반응은 좋은지, 이런 저런 것들을 살피며 같이 낄낄거리기도 하고 화도 내면서 끊임없이 이야기를 주고받습니다.


그러나 어제부터 저는 피디와 냉전을 벌이고 있었고, 방송이 진행되는 두 시간 동안 피디에게 한 마디의 말도 건네지 않았습니다. 음향감독님도 괜한 눈치를 살피느라 불편하셨을 겁니다.


그러나 이런 상황이 제일 불편한 사람은 다름아닌 피디입니다. 부스 안의 진행자와 바깥의 제작진을 연결해주는 사람이 바로 작가인데, 그 작가가 대놓고 냉전을 벌이니 모니터에 뭐라뭐라 지시 사항을 써달라고 말을 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대신 피디가 이야기할 법한 지시 사항들을 제가 알아서 모니터에 써서 올렸습니다.


사실 지시 사항이라고 해봤자 대단한 내용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방송 내용은 오히려 작가가 더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진행 흐름을 보아가며 알아서 모니터에 써 넣어도 되지만, 피디의 면을 세워주느라 지시를 받는 형식을 취하는 것뿐입니다. 예를 들면, 작가가 피디에게 '엠씨한테 이런이런 질문 하나 더 넣으라고 할까요?' 혹은 '이 청취자 댓글 올릴까요?'라고 물으면 피디가, '네, 화면에 띄워주세요' 하는 식입니다.


그러나 냉전 중인 저는 그런 질문 없이 알아서 디렉션을 화면에 띄웠고, 그 탓에 면을 구겼다고 생각한 피디는 상당히 기분이 나빴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에 대해서조차도 피디는 제게 말울 하지 못했습니다.


2. 우리가 냉전을 벌인 이유

제가 이토록 마음껏 분노를 표출할 수 있는 이유는 해고 통보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피디가 다른 프로그램으로 발령신청을 내는 바람에 제작진이 전부 해고를 당한 상황이기 때문입니다. 거기다 해고 통보도 하필 설 연휴 직전에 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부터 열까지 분노의 상황이긴 하지만, 방송국에서 이런 일은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에 프로답게 악수하고 마무리를 할 수도 있었습니다. 실제로 그렇게 했습니다.


애써 분노를 참으며, 으른답게 피디와 악수를 하고, 남은 한 달 동안 잘 마무리하자고 훈훈한 말들을 주고받은 후 집으로 돌아오는데, 단톡방에 장문의 카톡이 올라왔습니다. 피디가 보낸 것이었습니다. 내용인즉슨,


내가 그동안 배려를 많이 해줬더니 작가들이 내 배려를 당연하게 안다, 나는 이제 작가들을 봐주지 않겠다. 작가들은 앞으로 남은 한 달 동안 생방이든 녹음이든 무조건 출근해서 자리를 지키고 (보통 녹음방송에선 작가가 할 일이 없어서 출근을 하지 않습니다), 자기가 원고 수정을 요청하면 무조건 해라...


그렇습니다. 피디는 해고 통보를 한 날 정말로 제작진 단톡방에 저런 내용의 카톡을 보냈던 것입니다. 연민과 공감능력이 있는 온전한 인간이라면 명절을 앞두고 사람을 자르면서 저런 식의 카톡 갑질을 하지 않는 법입니다.


특히나 본인이 다른 부서로 발령 신청을 해서 제작진이 전부 실직을 하게 된 상황이라면, 설령 무언가 서운한 일이 있다하더라도, 이 순간만큼은 그냥 삭이고 넘어가는 법입니다. 프리랜서들은 지금 생계가 흔들리는 상황에 처해 있기 때문입니다.


3. 왜 젊은 피디들은 거만한가?

피디가 이런 식으로 행동한 이유는, 경험이 없어서라고 밖에 달리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보통 공채로 채용된 피디들은 삼십대 초반 정도에 입봉, 즉 온전한 자신의 프로그램을 맡게 됩니다. 그 전까지는 조연출 생활을 하며 바닥을 쓸고 도시락 심부름을 하다가 피디가 되는 순간부터 프리랜서부터 출연자, 그리고 각종 프로덕션 업체 어르신들까지 피디님, 피디님하며 융숭한 대접을 해줍니다. 그러다보니 착각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특히 젊은 피디들일 수록 이런 착각에 쉽게 빠져듭니다. 즉 자신들이 정말 대단하기 때문에 그런 대우를 받는다고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여기서 대단한 사람은 이런 신입 피디에게까지 깍듯한 대접을 해주는 경력 구단의 프리랜서들이지, 피디가 아닙니다. 이제 겨우 조연출 딱지를 뗀 신입 피디가 대단할 것이 뭐가 있겠습니다. 모두가 그저 다음 계약을 위해서 자본주의 웃음을 만면에 띄고 그 순간을 참고 있을 뿐입니다. 그저 비즈니스를 하는 중인 것입니다.


저와 함께 일한 피디 역시 이번에 처음 공중파 라디오로 입봉한 신입 중에 신입이었습니다. 그러나 피디로 오셨으니, 무슨 물정 모르는 소리를 해도, 이게 맞냐?싶은 디렉션을 줘도, 작가들부터 패널들까지 그저 네네하면서 배를 까뒤집어 보인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정말 대단한 사람인 줄로 착각을 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사람을 해고할 때 지켜야 할 기본적인 예의마저도 싸그리 잊어버리고 말았던 것 같습니다.


물론 이런 식으로 피디와 냉전을 벌이는 것이 프리랜서인 제게 좋을 리가 없습니다. 실제로 다른 작가 분들은 그런 카톡을 보고도 뒷담화는 야무지게 뒤에서 까시고 앞에서는 여전히 피디님, 피디님하며 미소를 잃지 않습니다. 피디가 원하는 대로 한 시간 녹음 방송도 열심히 출근합니다. 당연히 다음 계약은 그들이 따낼 것입니다.


그래서 이번 생존전략은 저에게 하는 조언입니다.




프리랜서 생존전략 No.8

고용주와의 냉전은 피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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