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직 방송작가의 살아남는 법에 대한 이야기
1년 6개월을
안녕하세요, 노파입니다.
방송작가에 관한 사람들의 가장 큰 오해 중 하나는, '방송작가가 되기 위해서는 글을 잘써야 하지 않을까?' 하는 것입니다. 반은 맞고 반은 틀린 말입니다.
맞는 분야는 드라마 작가입니다. 드라마 작가는 무조건 잘 써야 합니다. 말맛도 살아 있어야 하고 스토리라인도 매력적으로 구성할 수 있어야 합니다. 굳이 부연하자면, 김치 싸대기 같은 창의적인 막장 씬도 아무나 쓸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럼 구성 작가는 어떨까요?
극본 공모를 통해 방송국에 들어온 작가가 아니라면, 거의 대부분 구성작가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교양, 예능, 정보 프로그램 등 드라마를 제외한 모든 프로그램의 원고를 쓰는 사람이 바로 구성작가입니다. 그리고 처음 프로그램에 입문한 구성작가가 드라마에 처음 입문한 극본 당선자처럼 일필휘지의 글솜씨를 뽐낼 일은 없다고 보시면 됩니다.
구성작가들이 방송국에 처음 들어와 하는 일은 장소를 섭외하거나, 출연자를 섭외하거나, 기사정리를 하거나,써브와 메인 작가가 써놓은 대본을 출력해서 색도화지에 붙이거나, 소품을 챙기거나, 도시락을 주문하거나, 연예인 커피 심부름을 하는, 그런 류의 일입니다. 주로 전화 통화와 가위질, 그리고 뛰어다니는 일을 한다고 보시면 됩니다.
저도 서른세 살에 어느 쇼프로그램에 서브작가로 들어갔는데, 큐카드를 만든다고 밤새 색도화지를 붙이고, 한 출연자의 목 탄다 소리에 커피 심부름도 했습니다. 내가 대학원까지 나와서 이 밤에 나보다 어린 연예인님께 커피를 갖다 바쳐야 한다니 기분이 참 더럽구다, 싶으면 나가서 담배 한 대 피고 오시고, 그걸로도 해소가 안 되면 도망가시면 됩니다. 그래도 괜찮습니다. 기분이 좀 풀리면 또 다른 데 지원하면 됩니다.
이 시기가 흔히 말하는 막내작가 단계인데, 이 단계에서 쓰는 글이라고는 통화할 때 메모하는 것 밖에 없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오히려 글을 잘 쓰신다면 억울한 단계입니다.
그래도 서브 작가가 되려면 글을 잘 써야 하지 않을까?
서브작가가 되어도 사실 필력을 자랑할 일은 많지 않습니다. 물론 서브 작가 단계부터 원고를 쓰기는 합니다.그러나 써브가 쓰는 글의 종류라는 것이, 코너에 들어가는 짤막한 설명이나 자막이 대부분입니다.
만약 맡고 있는 프로가 예능이라면 '꾸앙, 개꿀, 굽신굽신' 따위의 의성어나 인터넷 댓글 장인들에 의해 제조되는 짧은 말의 어절을 주로 씁니다.
그러니깐, 우리가 글이라고 말할 때 떠오르는 주술관계가 일치되고 꽉 짜여진 논리구조 아래서 완성된 하나의 완결된 글을 쓸 일은 거의 없다고 보시면 됩니다. 글은 커녕 주어와 동사가 다 들어가 있는 온전한 문장을 쓸 일도 많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방송작가가 쓰는 것은 글이 아니라 말이기 때문입니다. 그나마도 구성작가들은 드라마 작가와 달리대화 형태의 온전한 말을 쓸 기회도 많지 않습니다.
사실 구성작가에겐 글쓰기 실력보다 어떤 아이템을 할지, 누굴 섭외하고 어떻게 그 사람을 컨택할지, 길거리 인터뷰는 어떻게 하고, 실험 참가자는 어떻게 데리고 올지, 이런 걸 짜내고 실행하는 능력이 훨씬 더 중요합니다. 그래서 '구성 작가'인 것입니다.
제가 지금 하고 있는 업무 중에는 다른 작가님들이 작성한 보도자료를 윤문하는 일도 포함돼 있는데 그 글들을 읽으면서 확실히 알게 됐습니다. 구성작가들은 제대로 된 글을 써 본 일이 거의 없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다들 5년 이상 경력을 가진 사람들이 쓴 글인데, 주술관계부터 맞지 않는 문장이 수두룩합니다. 휘발되는 말의 구절만 써온 탓일 겁니다. 말과 글은 엄연히 다른데, 방송작가들이 잘 쓰는 것은 글이 아니라 '말'입니다. 글은 방송작가보다 오히려 네이버 블로그를 오랫동안 써오신 분이 더 잘 쓰시는 것 같습니다.
그래도 메인 작가가 되려면 글을 잘 써야 되지 않을까?
하고 싶은 분야가 다큐멘터리라면, 메인작가가 되기 위해서는 글을 잘 써야 하는 게 맞습니다. 다큐멘터리 내레이션 원고를 쓰려면, 필력이라는 것이 정말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심금을 울리는 감각적인 말들이 영상에 잘 붙으면서도 너무 영상을 설명하는 설명체가 되지 않도록, 1인치쯤 떨어져서, 또 시간을 초 단위로 맞춰가며 써야 하는데 이게 정말 쉽지가 않습니다. 굉장한 기술이 필요합니다. 단순히 표현력만 좋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말을 해야 할 때와 안 해야 할 때를 감각적으로 파악해 침묵까지 하나의 언어로 사용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방송작가를 희망하시는 분들 중에 다큐작가를 꿈꾸시는 분들은 굉장히 드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일단 돈이 안 되기 때문입니다. 어느 정도냐 하면, 생계 유지가 안 되는 수준입니다. 일단 제작되는 다큐 프로그램 수 자체가 굉장히 적고 제작기간에 비해 방송 기간이 매우 짧습니다. 대작 다큐멘터리 맡아봤자 1년 준비해서 1주일 방송 나가면 끝입니다. 방송작가는 편당 고료를 받기 때문에 1년 동안 5편에 대한 고료를 받는다면 생활이 되지 않습니다.
몇년 전에 5부작 대형 다큐멘터리의 메인을 맡은 적이 있었습니다. 1년 6개월을 준비했으나 5일 방송하니 끝이었습니다. 물론 이런 경우 편당 고료를 굉장히 높게 쳐주긴 하나, 아무리 높게 쳐 줘도 편당 5백 선 입니다. 연차가 낮으면 더 낮은 금액이 책정돼 1년 반 동안 일했는데 고작 2200만원 정도의 돈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나마도 당시 저희 팀에 메인 작가가 두 명이었던 탓에 그 돈도 나눠야 했습니다. 그래서 1년 6개월 동안 메인 작가로 일한 후 제 통장에 입금된 돈은 9백만원이 채 안 됐습니다. (그래서 보조작가 일까지 혼자 다 하는 것으로 계약을 해서 간신히 입에 거미줄 치는 것은 면했다는 구구한 사정에..)
상황이 이러니 방송작가 중에 다큐 작가를 꿈꾸는 사람이 없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꿈꿔선 안 된다고 생각합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다큐멘터리 작가는 피디처럼 월급제로 가야한다고 생각하나, 그런 게 될 리가 없습니다.
그러면 다큐멘터리를 제외한 나머지 프로그램들의 메인작가는 어떨까요?
글을 엄청 잘 써야 할까요?
'그런데 말입니다~' 처럼, 히트치는 멘트 하나 쓸 수 있는 정도의 글솜씨면 충분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말을, 글을 못 써도 메인작가가 될 수 있다는 뜻으로 오해하시면 곤란합니다. 메인 작가 중에 말글을 못 쓰시는 분은 없습니다. 개중에는 긴 글도 굉장히 잘 쓰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다만, 방송작가가 되기 위해서 소설가처럼 조사 하나까지 완벽하게 통제하는 놀라운 글솜씨가 필요한 것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사실 완벽한 문장력이 오히려 방해가 되는 경우도 많습니다. 유능한 방송작가가 되기 위해서는 음슴체의 짧은 글과 쉽고, 속도감 있고, 트렌디한 말들을 더 빨리, 더 많이 아는 편이 훨씬 유용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할지라도,
방송작가들이 일반 사람들보다 글에 대한 관심이나 이해도가 높은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일단 문학과 출신이 많고(저도 문학과라는..) 또 오랫동안 글밥을 먹다보면 일반 생활인보다는 글을 더 잘 쓰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유는 단순합니다. 많이 써서 그렇습니다. 특히 라디오 작가는 일년만 작업해도 굉장한 글쓰기 트레이닝이 됩니다.
그러니 지금 내가 글을 잘 못쓴다고 방송작가를 주저할 필요는 없습니다. 방송국에서 버티다 보면 필요한 글쓰기 스킬은 알아서 몸에 배게 돼 있습니다.
사실, 구성작가는 글로 성공하는 직업이 아니라 버티기와 성질 죽이기, 그리고 무한 체력으로 성공하는 직업입니다. 이 부분은 모든 프리랜서에게 적용되는 내용일 것입니다.
그러니 방송작가로 일하는 것이 어떤 건지 궁금하시면, 글을 잘 쓰든 못 쓰든, 일단 한 번 들어와보시고 아니다 싶을 때 도망가도 늦지 않습니다. 저 역시 여러번 도망친 전력이 있는 도망자 출신인데, 방송작가가 팔자인 사람들은 결국 추노를 당해 돌아오게 돼 있습니다. 그러니 오셔서 한 번 자신의 팔자를 테스트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습니다.
프리랜서 생존전략 No.22
글쓰기 실력보다
인내심을 먼저 키울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