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직 방송작가의 살아남는 법에 대한 이야기
안녕하세요, 노파입니다.
오늘은 (2022년 2월) 마지막 라디오 방송을 하는 날입니다. 해고 통보 매너와 문자 갑질 문제로 피디와 한동안 냉전을 벌이기도 했으나 마지막 방송의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습니다. 4주라는 기간은 마음을 돌리기에 충분한 시간이었습니다. 그래서 한 달이라는 해고 고지 기간을 두는가 봅니다.
피디는 신입인 탓에 사람을 쓰고 보내는 방식이 서툴기는 하나, 마음이 모질지 못하여 이미 냉전 2주차부터 슬금슬금 말을 붙이며 곰살맞게 굴었습니다. 옹졸한 저는 한 주 정도 더 진상모드로 있다가 3주차부터 은근슬쩍 피디의 말을 받아줬습니다. 아무래도 인간관계라는 것이 부모의 원수, 뭐 이런 게 아니라면, 한두 번 싸웠다고 무자르듯 매정하게 쳐내지는 것이 아닌가봅니다.
밥줄이 끊길 정도로 심각한 일도 고작 한 달만 지나도 별 일 아닌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쟤라고 뭐, 일부러 그러고 싶었겠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나라고 뭐, 같이 일하기 쉬운 사람인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특히 내쳐지는 일이 부지기수인 프리랜서의 세계에선 이런 둥글둥글한 마음씀씀이가 어쩌면 실력보다도 더 필요한 덕목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일을 떠나서, 제 정신 건강에 도움이 되기 때문입니다. 하루에도 열 두 번씩 분노할 일이 생기는 방송국에서 매번 화를 냈다간 피디가 아니라 제가 먼저 나가떨어질 겁니다.
그렇다고 작가들이 호락호락한 사람들도 아니다보니, 분노 1주 차엔 피디 똥줄 좀 타게 방송 직전까지 원고를 주지말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하지만 프리랜서가 마감을 넘기는 것은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일 중에 하나입니다. 심지어 일부러 그랬다? 방송국에서 내용증명을 보내지 않은 것을 감사히 여기며 다른 업계의 일을 알아봐야 할 것입니다.
프리랜서 생존전략 No. 23
인간 관계와 업무는 분리시키기
특히 방송작가는 자신이 쓴 원고로 평가를 받기 때문에 해고 통보를 받았다고, 피디가 싫은 소리를 했다고, 줘야 할 원고를 안 주거나 형편없이 써서 줬다면, 일종의 전과를 단 것이라고 보면 됩니다. 재계약이 안 됐다고 일부러 방송을 망치고 간 사람에게 두 번 오퍼를 주는 고용주는 없습니다
특히 방송국은 업계가 좁습니다.
야,
나랑 같이 일한 작가가 말이야~
하면서 피디가 한 번 입을 털기 시작하면, 피디의 동기들, 선배들, 후배들에게까지 말이 쫙 돌게 되고, 전후 사정이야 어찌되었든 간에 여러분의 이름은 블랙리스트 1순위로 올라갈 것입니다. 대부분의 우리는 인기 드라마 작가도 아니고, 조회수 1, 2위를 다투는 웹소설 작가도 아니기 때문에 오직 성실함과 인내심만이 우리의 다음 계약을 보증해줍니다.
하지만 이런 리스크가 아니더라도 저는 애초에 그런 무리수를 띄울 수가 없었습니다. 원고가 늦게 나오면 가장 곤란해지는 것이 출연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 출연자분들 중 몇몇은 지금도 언니 동생하며 연락을 할 정도로 사이가 좋습니다. 그러니 피디가 밉다고 이분들께 민폐를 끼치는 일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특히 제가 하는 방송은 출연진이 전부 비방송인들인데 방송은 생방으로 진행되어 원고 의존도가 매우 높습니다. 애드립도 안 되는 전문가 출연자들에게 바로 몇 시간 전에 형편 없는 원고를 주면 방송은 더 형편없어집니다. 그러면 청취자들에게 욕을 먹는 것은 출연자들입니다. 출연자들때문에라도 저는 원고를 볼모로 피디에게 시위를 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말로는 으르렁대면서도 원고는 최고로 정성스럽게 써서 줬던 것입니다.
이렇게 원고가 제대로 돼 있으면 피디는 화를 낼 이유가 없습니다. 그리고 머릿속에는, 내가 좀 심했나? 하는 생각이 파고들 틈도 생깁니다. 그래서 오늘 피디가 미안했다는 말을 뻘쭘하게 끼워넣으며 마지막 인사를 했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갑자기 울먹거리길래 저는 얼른 그 자리를 도망쳐 나왔습니다. 다들 한 따까리씩 해보셨을 테니 잘 아실 겁니다. 차라리 화를 내는 게 받아치기 쉽지, 갑작스러운 반성 모드는, 정말이지, 어찌해야할 바를 모르겠단 말이지요.
하지만 제가 원고를 대충 써서 마지막 방송이 엉망이 됐다면, 이런 눈물의 사과가 있는 아름다운 해피엔딩이 아니라 제게는 무책임한 작가라는 낙인이 주홍글씨처럼 오래도록 따라다녔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피디가 밉더라도, 원고는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해서 보내셔야 합니다. 그게 피디에게 가장 크게 한 방 먹이는 방법입니다.
프리랜서 생존전략 No. 23
사람은 미워도
일은 완벽하게!
마지막 원고는
더욱 완벽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