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방송작가가 되면 좋은점

현직 방송작가의 살아남는 법에 대한 이야기

by NOP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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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노파입니다.


지금껏 방송작가의 단점에 대해서만 얘길하다보니 안 그래도 살기 힘든 세상에 더욱 기운이 빠집니다. 그럴 때는 방송작가로 일을 해서 좋은 점에 대해 생각하며 멘탈을 다잡아야 합니다.


더군다나 이 책은 방송작가가 쓰는 글입니다. 절대적으로 방송작가에게 유리하도록 편향된 시각으로 쓰인 글이라는 점을 항시 유념하셔야 됩니다. 제 얘기만 들으면 마치 세상 모든 피디가 찐따거나 무개념이 아닐까, 오해하시는 분들도 있을 것 같은데,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일을 하는 모습을 보면 존경심마저 드는 피디도 있습니다.


제가 처음 같이 일했던 다큐멘터리 피디님이 그랬습니다. 출근을 6시에 해서 모든 촬영 일정과 회의 내용을 숙지하고 계셨고, 주제에 대한 이해라든지, 돌아가는 일을 장악하는 능력이라든지 많은 면에서 탁월한 분이셔서 당시 제작팀 모두가 피디님을 의지했습니다. 덕분에 첫 방송인데도 큰 상도 받았습니다. 물론 모든 피디가 그런 줄 알고 계속 방송국에 남아 있다가 결국 발목이 잡히고 말았지만, 아무튼 여러분은 지금 보시는 내용이 프리랜서에게 유리하도록 필터가 씌워져 있다는 사실을 늘 염두에 두셔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은 반성의 의미에서, 또 멘탈 관리 전략의 차원에서 방송작가라는 직업의 장점에 대해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1.라디오 작가의 장점

라디오 방송의 경우, 진행은 보통 DJ와 코너를 담당하는 패널(게스트)이 함께 끌어가도록 돼 있습니다. 그러나 내용적인 측면에서 DJ가 기여하는 바는 거의 없습니다. 주로 패널과 작가가 다 한다고 보면 됩니다. DJ의 역할은 작가가 쓴 원고를 읽으면서 간간이 애드립을 치는 게 전부입니다. 그거라도 잘하면 훌륭합니다. 많은 경우 DJ는 프로그램의 얼굴 마담 역할을 합니다. 그러나 얼굴마담을 누구로 쓰느냐가 방송의 성패를 좌우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제가 하던 라디오 방송은 법률 정보 프로그램이었습니다. 그래서 매일 다른 분야의 변호사나 박사님, 로스쿨 교수 등 우리나라 최고의 먹물들과 함께 일을 했습니다. 그러나 늘 그렇듯 타이틀이 그 사람을 말해주진 않습니다. 아무리 학문적으로 빛나는 성취를 이뤘다고 해도, 근본이 어떻게 생겨먹은 사람인지는 같이 일을 해봐야 압니다.


그리고 이미 많은 분들이 알고 계시듯, 먹물 중엔 위선자들이 많습니다. 먹물들의 이 위선자스러움을 정으로 쪼개고 갈아 마치 정의의 사도처럼 보이게 만드는 것이 법률방송 제작진이 맡은 제일 중요한 역할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개인적으로는 출연자가 아무리 꼴뵈기 싫어도 청취자들에겐 멋진 판사님, 변호사님으로 보이게 만들어야 합니다. 이걸 못하면 방송을 하면 안 됩니다.


그런데 사회적으로 이렇게 큰 성취를 이룬 사람들 중에 인격까지 갖춘 훌륭한 분들이 열에 한 명은 존재합니다. 아주 드물긴 하지만, 그런 분들을 만날 수 있다는 점이 방송작가라는 직업이 가진 최고의 장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방송국이 아니면 저처럼 이렇게 법 없이도 살 사람.. 은 아니고, 저처럼 이렇게 평범한 사람이 어떻게 이런, 똑똑하고 멋지고 인격적으로 훌륭한 사람을 만날 수 있겠습니까.


2. 누가 좋은 게스트 일까

사실 라디오 작가에게 가장 훌륭한 사람은, 방송 자료를 충실하게 만들어 보내주는 사람입니다. 사실 청취자들은 변호사들끼리 대화를 나누는 방식의 법률 방송을 들으면 출연자들이 알아서 방송을 이끌어 나가는 거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전문가들이니깐 자기들끼리 사건 내용을 이야기하는 것 쯤은 어렵지 않을 거라고 여기는 겁니다.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구획된 시간의 틀 안에서 적절한 템포를 유지하면서 법적인 내용을 정확하고 속도감 있게, 그러면서 일반인이 알아들을 수 있는 일상의 말로 전달할 수 있는 사람은 판사 아니라 판사 할아버지도 못하는 일입니다. 혼자 많이 아는 것과 아는 것을 쉬운 말로 정확하게 전달할 수 있는 것은 전혀 다른 종류의 능력입니다. 그리고 전문가들일 수록 이런 전달 능력이 떨어집니다. 자신들이 쓰는 용어를 사람들이 못 알아 듣는다는 것을 알지만 자신도 그 용어를 쉬운 말로 풀어서 설명할 줄 모릅니다. 50분 동안 지루하지 않게 핵심만 정확히 짚어 기승전결을 만들어내는 능력도 없습니다. 그래서 작가가 일일이 할 말을 원고로 써주는 것입니다.


대신 게스트는 작가에게 자신들이 이 사건의 어떤 부분을 이야기 할 것인지, 무엇이 핵심 개념인지 등을 자료로 망들어 전달해줘야 합니다. 그러나 이 자료조차 제대로 만들어주는 게스트도 거의 없습니다. 귀찮으니 법전 몇 장 복붙해서 던져준 후 작가가 알아서 떠먹여주길 바랍니다. 법전에서 핵심 내용을 추려서 쉬운말로 개념을 풀어낼 줄 알면, 제가 로스쿨에 가지 왜 작가를 하고 있겠습니까?


3. 내가 만난 최고의 게스트

그런데 게스트 중엔 매번 시의성도 있고 의미도 있는 주제를 찾아서 성실하게 자료를 넘기는 변호사님이 계셨습니다. 그렇다고 이 자료들의 뼈를 발라내서 청취자들이 이해하기 쉬운 말로 살을 붙여내는 작업이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래도 패널이 열심히 하면 작가는 더 신경써서 원고를 작성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분의 방송을 듣고 사람들이 좋아하길 바라기 때문입니다.


거기다 이 변호사님은, 피디도 마지막 방송을 챙기지 못하고 있을 때 조촐하게 둘이서라도 막방 기념을 하자며 멀리 교외에 있는 플랜테리어 카페에 데리고 가셨습니다. 보통은 피디를 데리고 가는데, 저같은 하급 생계형 작가를 위해 시간을 내신 겁니다. 오해할까봐 말씀드리면 변호사님은 기혼 여성분이십니다. 참고로 저도 여성입니다.


이렇게 나와 다른 배경에 있는 사람을, 그리고 정말 괜찮은 사람을 만날 수 있다는 점이 방송작가의 최대 장점입니다. 이런 빛나는 순간들이 드문드문 놓여 있기 때문에 그 순간을 징검다리 삼아 오래도록 방송작가의 길을 건너갈 수 있는 것입니다.



프리랜서 생존전략 No.14

아주 드물지만, 직업이 가진 좋은 점을 계속 생각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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