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직 방송작가의 살아남는 법에 대한 이야기
안녕하세요, 노파입니다.
방송작가는 대부분 팀으로 일을 합니다. 독고다이하는 것 같은 다큐멘터리 작가도 리서쳐와 수시로 소통해야되고 특히 피디와는 머리를 공유한 것처럼 움직여야 합니다. 라디오 작가의 경우도 패널들과 계속 소통을 해야하므로 매일 2인 1조의 팀플레이를 한다고 보시면 됩니다. 팀플레이를 싫어하시는 분들이라면 이 부분이 꽤나 괴로우실 것입니다.
사실 유난스럽게 티를 내지 않는다고 해서 다른 사람들이 팀플을 좋아하는 것은 아닙니다. 팀에는 언제나 찐다가 한 명씩 껴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팀플하면서 한 번도 그런 경험을 해 본 적이 없는데요?
그럼 본인이 찐따였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러니 정신 건강을 위해 우리는 다, 찐따때문에 힘들었던 사람으로 해두겠습니다.
찐따는 여러가지 형태로 나타납니다. 뺀질거리는 애, 멍때리는 애, 예민한 애, 찐따들 때문에 힘들어 하는 애, 그리고 프리라이더. 이들 중 최악은 단연 프리라이더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지금 제가 일하고 있는 제작팀에는 놀랍게도 피디가 찐따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형태는 뺀질이입니다. 일주일에 프로그램을 한 개씩 납품하는 일정인데, 그이는 피디라는 작자가 뺀질뺀질, 앞에서 며칠씩 잡아먹는 바람에 후공정을 맡은 제가 급하게 밤샘을 해서 마무리를 해야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원래 프로그램의 마무리는 피디가 해야할 일입니다. 모든 프로그램의 결과는 철저하게 피디 책임이기 때문입니다. 작가가 왕이라는 드라마조차도 최종 결과물의 책임은 피디에게 있습니다. 그래서 기획은 피디와 작가가 함께 해도 프로그램의 최종 감수는 당연히 피디의 몫입니다.
그러므로 작가인 제가 영상의 최종 감수를 맡고 있다는 것은 무언가 상황이 좋지 않다는 것을 뜻합니다. 한편으로는 제가 지금 맡은 일이 프로그램 제작이 아니라 VOD 제작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기도 합니다. 어떤 프로그램이 공전의 히트를 치면, 방송국에서는 그 프로그램을 글로벌 컨텐츠로 재제작하여 해외에 팔기도 합니다. 그 재제작 일이 현재 제가 하는 일입니다. 구체적으로는 해외수출용 VOD를 제작하는 팀에서 편집 작가로 일을 하고 있습니다.
재제작은, 이미 잘 만들어진 프로그램을 다시 다듬는 수준이기 때문에 프로그램을 처음부터 제작하는 것보다 일이 훨씬 수월합니다. 피디 입장에선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 다른 피디가 만들어 놓은 영상을, 작가가 준 편집원고 내용대로 다듬는 일이기 때문에 속되게 표현하면 날로 먹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단점은 있습니다. VOD 피디가 아무리 영상을 잘 다듬어도 스크롤에는 그의 이름이 올라가지 않습니다. 작가인 제 이름도 올라가지 않습니다. 원제작팀의 피디와 작가의 이름만 올라갑니다. 당연한 일입니다. 진짜 고생은 원제작팀에서 다했고 재제작팀은 거기에 얹어가는 수준으로 일을 하기 때문에 공은 제작팀에서 가져가는 게 맞습니다.
그런 이유로 방송국에서는 VOD 제작을 정규직 피디에게 맡기지 않습니다. 실컷 공채로 피디를 뽑아놨더니 다른 사람이 만들어 놓은 것을 다듬는 일이나 하고 있으면 사장 입장에선 뚜껑이 열릴 일입니다. 그래서 이런 일은 보통 연차가 낮은 프리랜서 피디에게 돌아갑니다. 그러면 간택된 피디들은 감사합니다,하고 넙죽 받아먹어야 합니다. 일도 쉽고 급여도 나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저희팀 프리랜서 피디는 찐따 짓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차피 다른 피디의 이름으로 나가니깐 일을 대충하는 것이리라 생각됩니다. 그러나 그가 대충 똥을 싸 놓으면 후공정, 즉 편집 영상을 감수하는 일을 맡은 제가 그 똥을 치우느라 밤을 새워야 합니다. 편집 실수, 원고 내용 미반영, CG 누락을 잡아내는 것에서부터 번역업체에서 엉망진창으로 번역 한 부분부터 자막 표기 오류까지 다 잡아내야 합니다. 15분짜리 강의 한 편을 초단위로 살피면 감수하는 데만 15시간이 걸립니다.
방송작가가 그런 일도 하나요?
입금되면 다 합니다
이것은 프리랜서 세계에서 굉장히 중요한 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룰을 어기면 다음 일거리가 안 들어온다고 보시면 됩니다. 애초에 제가 번역 오류까지 잡아낼 수 있기 때문에 이 일이 다른 사람에게 안 가고 제게 온 것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 룰을 어긴 우리의 프리 피디님도 결국 잘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방송국에서 잘렸다는 것은, 당장 짐 싸, 가 아니라 이번 계약까지만 하고 다음 계약 연장은 안 하겠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저는 이 뺀질이 피디와 기존에 계약한 분량까지는 계속 같이 일을 해야한다는 뜻입니다. 계약 연장이 안 됐으니, 현재 그는 더욱 대충대충 일을 하고 있고 저는 그 똥을 치우느라 오늘도 동이 터야 잘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이러한 갑작스런 밤샘에 대비해 프리랜서들은 집에 늘 인스턴트 죽을 쌓아두는 것이 좋습니다. 4번째 끼니로 오뚜기 죽만한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프리랜서 생존전략 No.9
팀플을 한다면, 세상 모든 팀에 존재하는
찐따의 활약에 대비할 것
+ 갑작스런 밤샘을 대비해
오뚜기 죽은 항시 쟁여놓을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