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팀 작업 시 빌런을 처리하는 방법

현직 방송작가의 살아남는 법에 대한 이야기

by NOPA
방송작가-001.jpg




안녕하세요, 노파입니다

오늘은 방송작가들도 잘 알지 못하는 영상 재제작 작업은 어떻게 진행되는지, 그리고 방송국 프리랜서들의 평범한 연휴는 어떤 모습인지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1. 방송작가의 흔한 삼일절 모습

저는 외국인의 강의 영상을 재제작 하는 일을 맡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은 2022년 3월 1일, 삼일절입니다. 순국열사의 혼을 기릴 새도 없이 아침부터 자막 업체로부터 한국어와 영어, 두 개의 자막 파일을 받아서 영상을 감수합니다.


오후쯤 되니 다른 영상 편집이 끝났다고 피디가 톡을 보냅니다. 저번에 그 뺀질이가 간 자리에 새로운 피디가 왔는데, 빨간날에도 방송국에 출근하는 편집을 하는 보통의 프리피디였습니다. 다행입니다. 저는 자막 업체에 연락해 새로운 영상 자막은 언제 받을 수 있는지 묻습니다. 업체에서 자막을 보내줘야 한꺼번에 영상과 자막을 감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업체에서는 그 영상 자막은 빨라야 이번주말에 줄 수 있다고 합니다. 그 한마디의 우리 팀 전체의 생산 공정이 여기서 끝나고 맙니다.


사실 어느덧 방송국 고인물이 돼버린 저로서는 업체의 대답이 이해가 안 됩니다. 이미 자막 문서가 다 만들어져 있기 때문에 15분짜리 영상에 자막을 옮겨 붙이는 작업 따윈 반나절만 바짝 집중하면 끝낼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입니다. 앗, 제가 너무 꼰대처럼 말했나요?


하지만 다들 기한을 맞추기 위해 밤이고 낮이고, 빨간날이고 까만날이고 자기 순서 오면 그저 기계처럼 일을 하고 있는데, 자막에서 4일이나 소요되다니, 너무 무책임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는 팀으로 일을 하기 때문에 한 명이 뭉개고 있으면 팀 전체가 뭉개고 있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런 느림은 곤란하다고 말씀드립니다. 방송국에서 요구한 납품 기일을 맞추려면 적어도 내일까진 주셔야한다고 설명을 드립니다. 그러나 자막 업체 팀장님은 물러설 기미가 없습니다.


저도 기일 맞추려고 최선을 다해 애쓰는 중이에요.

'어, 주둥이로만' 이라고 저는 속으로 생각합니다. 진짜 애를 쓴다면 오늘 밤이라도 넘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저는 더 따지지 않았습니다. 예전 같으면 뭐하는 데 시간이 그렇게 필요하냐고, 하나하나 따져가며 팀장과 실랑이를 벌였을 겁니다. 그러나 이젠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에너지를 쓰기엔 너무 늙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징글징글한 프리랜서의 현실을 살다면 남들보다 빨리 늙게 됩니다.


2. 책임 소재 가리기

대신 저는 업무 일정표를 만듭니다.


작업 소요 시간
작가 : 3월 1일-하루
피디 : 3월 2일-하루
CG팀 : 3월 3일-하루
자막업체 : 3월 4일~3월7일-나흘


그리고 이 일정표를 방송국 단톡방에 공유합니다. 누구때문에 납품이 늦어지는 건지, 고용주가 볼 수 있도록 공유하는 것입니다. 팀 플레이를 할 땐 책임소재를 가리는 일이 매우 중요합니다. 납품이 늦어지면, 방송국에선 팀 전부를 한 데 묶어 하나의 똥덩어리로 보기 때문입니다.


누가 똥이고 누가 된장인지, 미리미리 부지런히 가려놓지 않으면 어느 순간 저까지 똥이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다음 계약에 영향을 받습니다. 그렇다고 나까지 똥을 만들 셈이냐며 다른 프리랜서를 직접 닦달하는 것은 옳은 행동이 아닙니다. 그렇게 애써봤자 다, 남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업무적으로도 이것은 고용주가 해야 할 일입니다. 보통은 제작팀 내의 정규직 피디가 고용주인 관계로 피디가 할 일이나, 재제작 팀은 정규직 피디를 배정해주지 않았으니 이것은 우리에게 업무를 맡긴 재제작 부서 김과장의 역할입니다.


문제는 김과장이 제가 그 역할을 하길 바란다는 것입니다. 김과장은 한 번도 제작일을 해본 적이 없는 행정인력인데다가 그나마도 이번에 경력직으로 들어와 이 방송국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사정을 잘 모릅니다. 반면 저는 이 방송국의 고인물이이나 마찬가지고, 설치는 걸 보아하니 주인의식도 있는 것 같으니 너 우리편이잖아, 하며서 배드캅 역할을 맡기고 싶은 겁니다.


3. 우리 편이라는 착각

방송작가로 일을 하다보면 특히 피디로부터 너 우리 편이잖아, 하는 뉘앙스의 말을 들을 일이 종종 있을 겁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긴장하셔야 합니다. 그런 말이 나오는 순간은 딱 두 가지 경우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첫째, 페이를 주지 않고 일을 더 부려먹고 싶을 때

둘째, 자신이 욕먹을 것 같은 일을 프리랜서에게 떠넘기고 싶을 때


그러므로 이런 경우 절대!고용주의 장단에 놀아나선 안 됩니다 여차하면 양쪽에서 욕 먹기 딱 좋기 때문입니다. 김과장이 제게 이런 역할을 맡기고 싶은 이유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자기가 그 역할을 했다가 혹시나 갑질했다는 소리가 나올까봐서 입니다. 특히 공영방송국에서 일하는 행정직원들은 동사무소에서 철밥 드시는 분들과 성향이 비슷하다고 보면 됩니다. 굳이 다른 사람에게 욕을 먹어가면서까지 애써 일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인생사 제 뜻대로 되는 거 하나도 없다지요. 우리의 김과장은 이로부터 6개월 후 결국 갑질 혐의로 회사 감사실 조사를 받게됩니다. 회사 변호사를 통해 혹시 모를 법적 공방 준비도 해야했습니다. 심심할 틈 없는 인생입니다. 참고로 고발자는 저입니다. 자세한 이야기는 다른 편에서 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4. 결론

프리랜서는 항상 가운데로 줄을 잘 타야 합니다. 다른 프리랜서가 일을 못한다고, 고용주가 배드캅 역할을 원한다고, 나서서 교통정리를 하는 것은 주제넘는 일입니다. 당장이야 고용주에게 눈도장을 찍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한 걸음만 물러서 보면 그저 이용당하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상황이 바뀌면 자신도 언제든 한 큐에 계약을 해지당할 수 있는 날품팔이, 외부인 신세라는 걸 명심, 또 명심해야 합니다. 이것이 프리랜서의 현실입니다.



프리랜서 생존전략 No.10

프리랜서는 자기 일만 잘하면 그만!

단,
미리미리 책임 소재를 가려서
나중에 덤탱이 쓰는 일도 없도록 할 것
keyword
작가의 이전글#22. 방송작가가 되려면 글을 잘 써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