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면접, 환갑까지 함께하는 동반자

현직 방송작가의 살아남는 법에 대한 이야기

by NOP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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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노파입니다.

프리랜서로 먹고 살려면, 죽을 때까지 본다는 것은 과장이고, 국민연금과 노령연금이 나오기 전까지는 계속 본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물론 면접을 안 보고도 프리랜서로 사는 것도 가능합니다. 갖고 계신 집이 재건축 승인이 났거나 1, 2억 사둔 주식이 삼십년 후 쯤 복리의 마법을 부렸다면, 면접을 안 보셔도 살 수 있습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2,30년 후에나 덕을 볼 수 있을 것 같으니, 연금받기 전까지는 계속 면접을 보러 다닌다고 생각하시는 편이 마음이 편하실 겁니다. 참고로 프리랜서도 국민 연금 넣을 수 있습니다. 못 받지 않을까 고민하지 마시고 일단 넣어두시길 바랍니다.


특히 방송작가의 경우에는 계약은 6개월 단위로 하고, 프로그램은 1년도 안 되서 끝나는 방송이 수두룩 하니, 다음 밥벌이를 위해서는 메뚜기처럼 철마다 면접을 보러 다니는 일을 숙명처럼 안고 삽니다. 만일 연차가 어느 정도 쌓인 작가라면 전에 일하던 피디의 소개로 알음알음 면접을 보는 경우가 있겠으나 그렇지 않다면 직접 손품을 팔아야 합니다. 주로 작가 단톡방이나 구성다큐연구회에 올라온 공고를 보고 지원을 합니다. 아니면 인크루트나 사람인 같은 구직 플랫폼을 이용할 수도 있습니다. 이런 경우 작가들은 폴더폰처럼 아주 납작하게 엎드린 상태에서 면접을 보게 됩니다. 널린 게 작가고, 우리는 천하의 을이기 때문입니다.


저 역시 벼러별 면접을 다 본 것 같습니다. 정규직 공채 뽑는 걸로 착각하는 것이 아닌가 싶은 방송사 피디와의 압박 면접도 보았고, 애인을 뽑는 건지 작가를 뽑는 건지 분간이 어려운 개인 프로덕션의 변태 대표와도 면접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서브 작가를 뽑는 경우, 보통은 프로그램 피디와 메인작가가 사무실 한 켠에 있는 회의실에서 캐쥬얼하게 면접을 봅니다. 어떤 경우가 됐든, 작가들은 늘 돈이 궁한 상태에서 면접을 보기 때문에 만면 가득 자본주의 미소를 띄우고 그들이 원하는 대답을 해주기 마련입니다.


1. 이상한 면접


그런데 어제 제가 본 면접은 지금까지와는 좀 달랐습니다. 피디의 소개로 면접을 보았는데, 특정 프로그램의 작가를 구하는 것도 아니었고 무엇보다 방송국이 아니었습니다. 중소 규모의 미디어 업체였습니다. 다른 분야도 마찬가지겠지만, 방송업계는 특히나 업체 사이즈가 작을 수록 먹튀의 위험이 크기때문에 무슨무슨 프로덕션, 무슨 기획사, 하면은 일단 긴장을 해야합니다. 하지만 방송국 차장씩이나 되는 사람이 설마 사기꾼을 소개시켜줬을까, 하는 생각에 일단 가 보았던 것입니다.


사실 프리랜서들은 여긴 아닌 것 같다는 예감이 들어도 일단 가서 면접을 보시는 게 좋습니다. 예감이라는 건 얼마든지 틀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6개월마다 계약갱신을 당하는 날품팔이 신세에 고작 예감 따위에 생계를 날리기엔 손해가 막심합니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면접을 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그리하여 저 또한 무려 2년 만에, 빛나는 강남 대로에 발을 딛고 어느 반짝이는 건물의 내부로 들어갔습니다.그곳에서 본부장이라는 사람의 안내를 받아 대기실로 들어갔습니다. 대표는 다른 데서 회의중이라고 했습니다.


좋좋소들이 으레 그러하듯, 중소규모의 미디어 업체들 또한 명함을 죄다 '본부장' 아니면 '이사'로 파기 때문에 실제로 보면 대기업의 본부장이나 이사와 매우 다른 모습입니다. 30대 후반에서 40대 초중반의 사장 태 안 나는 젊은이를 상상하시면 됩니다. 그런데 이 업체의 젊은이는 그 정도가 좀 심했습니다.


대기실에서 10분쯤 기다리자 맨투맨 티셔츠를 입은 젊은이가 한 손에는 주스를 들고 방으로 들어오는데, 처음엔 편집 감독인 줄 알았습니다. 여기서 편집감독이란,


2. 편집감독이란?

방송국에 조연출로 들어와 영상 편집을 제법 잘 하길래 편집 일을 계속 시켰더니 어느덧 편집만 10년씩 하고 있는, 편집실의 지박령 같은 분들이 바로 편집감독입니다.


프로그램을 직접 기획하고 연출하는 피디와 달리, 편집감독은 주로 편집실에 앉아 촬영팀이 찍어온 영상을 붙이는 일을 합니다. 그래서 실력 좋은 편집 감독이 있으면 영상을 개떡같이 찍어도 찰떡같이 방송이 만들어집니다. 때문에 방송국에는 편집 한 번 안하고 실력 좋은 편집 감독에게 빌붙어 사는 기생충같은 피디도 있습니다. 글을 못 써도 작가로 먹고 사는 사람들도 있으니 밥벌이의 세계가 그다지 가혹한 것 같진 않습니다.


그럼 저는 왜 이 늙은 힙스터를 보고 편집감독이라고 생각했을까요? 사실 우리가 30대에 이런 옷을 입고 40대엔 저런 말투를 쓰는 이유는 주변에서 사람들이 그렇게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더불어 살다보면 나이대에 맞는 옷차림과 언행을 자신도 모르는 사이 자연스럽게 습득하게 됩니다. 그래서 30대가 되면 20대의 거칠고 힙한 물이 절로 빠지게 되는 것이지요.


하지만 20대에 편집실에 들어간 편집감독들은 그 골방에서 홀로 세월을 보내느라 중년을 향해 가는 사람들이 어떤 옷을 입고 어떤 언행을 하는지 자연스럽게 체득할 기회를 얻지 못합니다. 그래서 옷차림이나 행동거지는 여전히 20댄데, 얼굴만 늙어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때문제 저는 갑자기 제 앞에 나타난 이 남자가 편집감독일 거라고 생각했던 겁니다. 제 눈빛을 읽은 남자가,


본부장은 쫌 늦을 것 같네요.


라고 운을 뗍니다.


본부장을 '님'이라고 부르지 않음으로써 자신이 그보다 더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임을 보여주려는 것이죠. 좋좋소에서 본부장보다 더 높은 위치에 사람이라면? 그렇습니다. 그가 바로 이 업체의 대표였습니다. 알고봤더니 대표는 지금 제가 일하는 방송국에서 조연출로 일을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30대 초반에 나와 자기 회사를 차린 것입니다. 그것은 참으로 대단한 일입니다.


3. 조연출이란?

방송국 조연출이라고 하면, 대학에서 영상을 전공하던 친구들이 졸업 직후 2년짜리 계약직이나 단기 파견직으로 방송국에 첫발을 떼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들 중 학벌이 탄탄한 친구들은 방송국에서 험하게 부려지며 방송국 공채를 준비하고 그렇지 않은 친구들은 2, 3년 정도 조연출 생활을 버틴 후에 프리랜서 피디가 됩니다. 아니면 아까의 경우처럼 편집감독이 되어 편집실을 지킵니다.


이들은 방송국 공채로 들어온 정규직 피디들과 함께 조연출 시절을 보내고 이후에도 밤낮없이 일하며 삼십대를 보냅니다. 그러다 불혹 즈음, 자신과 동고동락했던 정규직 피디들은 차장, 부장을 달며 삶의 정점을 향해 고속 질주를 하는 사이 자신들은 새로 들어온 젊은 피디들과 일을 하기에는 어느덧 부담스러운 나이가 됐음을 자각하게 됩니다.


새로운 감각으로 무장한 젊은 조연출, 젊은 프리 피디들은 계속 들어오는데, 자신들이 가진 기술이 이들에게 대체되지 못할 정도로 대단한 것이 아님을 깨달으며 이들은 방송작가만큼이나 불안에 시달리는 중년을 맞이하게 됩니다. 그러나 딱히 뾰족한 수를 찾지 못해 계속 불안한 생활을 이어갑니다.


그런데 지금 제 앞의 이 젊은 대표는 그런 불안한 중년이 되기도 전에 방송국을 박차고 나와 강남 한복판에 46명의 직원들이 일하는 자신의 회사를 차린 것입니다. 그러니 대단하다고 할 수밖에요!


4. 마음에 안 드는 회사 면접 전략

대표는 제게 함께 아이템을 기획하고 함께 회사의 미래를 고민할, 회사의 전속 작가를 구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미안하게도 저는 그 회사의 미래를 고민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저는 글을 쓰는 작가로 살고 싶은 것이지, 사업의 명운을 걱정하는 사업가가 되고 싶은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이 회사는 제 회사가 아닙니다. 실컷 미래를 고민해봤자 종놈 주인 걱정하는 꼴밖에 안 됩니다.


숱하게 말씀드렸지만, 프리랜서에게 주인의식은 오히려 독입니다. 심지어 고용주도 좋아하지 않습니다. 피디 입에서, 이게 니 프로그램이야? 하는 소리가 나오기 일쑤입니다. 몇 년 전에 실컷 영혼을 바쳐 일한 프로그램이 큰 상을 받게 되었을 때 마침 피디가 출장을 가는 바람에 누군가 대리 수상을 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회사에서 대리 수상자로 내세운 사람은 우리 프로그램과는 아무 관련도 없는 옆 팀 피디였습니다. 왜냐하면 출장 간 피디를 제외하고는 제작진 중에서 정규직 직원이 한 명도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다고 말 한 번 섞어본 적 없는 옆 팀 피디를 대리 수상자로 내세운다는 것이 제게는 몹시도 괴이해보였으나 그것이 관행이라고 합니다. 그때 프리랜서는 주인의식을 가지면 안 된다는 사실을 뼈에 새겼습니다. 그래서 저는 회사의 미래를 함께 고민할 작가를 구한다는 대표의 말에 강박적으로 거부감이 일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추구하는 것이 서로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면, 면접 분위기는 완전히 달라집니다. 천하의 을이 되어 납작 엎드릴 필요도 없고, 제 얘기만 들려줄 필요도 없습니다. 너는 어떤 사람인지, 너네 회사는 정확히 뭐하는 덴지, 서로 물어보며 답하는, 찬란한 대화의 장이 펼쳐지게 됩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정말 많은 대화를 나눴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많은 말들이 오가는 와중에도 저는 전속작가로 일하기 싫다는 말은 굳이 꺼내지 않았습니다. 그저 제가 지금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 제가 잘 하는 일과 못하는 일에 대해 알려줬습니다. 그럼 제가 할 만한 일이 들어오면 그쪽에서 연락을 줄 것이고, 안 줘도 그만입니다. 그들은 제가 프리랜서로 일하면서 스쳐지나간, 여러 업무 관계 중 하나로 남게 될 것입니다.


그쪽에서도 저의 이런 속사정을 이미 눈치챘을 것입니다. 어떻게 회사를 차리게 됐냐, 회사의 이상이 무엇이냐 같은 것들을 묻는 면접자는 많지 않을테니까요. 그럼에도 그들이 저와 이렇게 오랜 대화를 나눈 것은, 그쪽에서도 저를 버리자니 아깝고, 쓰자니 좀 또라이같기 때문일 겁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저처럼 애매모호한 사람과 한시간이 넘도록 이야기를 나눌만큼 그들의 회사가 바쁘지 않기 때문일 겁니다.


그리하여 저는 제법 흥미로운 인생 스토리를 가진 사람과 한시간 넘게 수다를 떤 것에 오늘 면접의 의의를 두기로 했습니다.


여기서 짚어드리는 프리랜서 면접 전략의 핵심은, 회사가 이상한 곳이 아니라면 굳이 나서서 거절의 말을 할 필요는 없다는 것입니다. 당장은 일이 구미에 당기지 않더라도, 프리랜서로 길고 가느다랗게 먹고 살려면 모든 인간 관계에 가느다란 인연의 끈 정도는 남겨두는 것이 좋습니다. 그 끈이, 언젠가 '알음알음' 소개로 이어질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프리랜서에게 '알음알음'은 매우 중요한 생존의 치트키입니다.




프리랜서 생존 전략 No. 14

1. 면접은 무조건 간다!
2. 회사에 문제가 없으면, 굳이 거절하는 말은 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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