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실컷 욕하고 보니 업무 단톡방이었다면?

현직 방송작가의 살아남는 법에 대한 이야기

by NOP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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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노파입니다.

일을 하다 보면 이런 생각이 드는 경우가 발생합니다.


지금 악마가 장난을 친 것인가?

참고로 저는 신도 안 믿고 천사도 안 믿고 선녀도 안 믿습니다. 그럼에도 지금 악마가 실재한다고 믿을 법한 일들이 벌어지는 순간이 있습니다. 기독교인도 아닌데 이런 생각이 들었다면 상황이 꽤 심각하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실컷 욕을 쓰고 봤더니 회사 단톡방이었을 때가 가장 대표적인 순간일 겁니다.


이번 주제는 꼭 프리랜서에게만 국한되는 내용은 아닙니다. 저 역시 직장인으로 살아본 적이 있고, 그때도 지금과 비슷한 상황을 겪은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똑같은 생각을 했습니다.


필경 이것은, 악마가 한 짓이다


어제는 영상 검수 작업을 하다가 그런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1. 일의 기쁨과 슬픔

앞 장에서 말씀드렸듯, 영상을 검수하는 날은 온종일 소처럼 일을 해야 합니다. 편집 영상을 보고, 원고를 보고, 자막을 보고, 번역을 보고, 또 방송 원본까지 보는 일을 계속 반복합니다. 때문에 15분짜리 영상 한 편을 검수하는 데 세 시간씩 걸립니다. 그런데 보통 5편씩 검수를 하기 때문에 검수 작업이 있는 날에는 자정이 넘어야 일이 끝날 때가 많습니다.


검수 작입은 원래 이렇게 오래 걸릴 일이 아닙니다. 앞 공정에서 피디와 자막 업체가 영상 편집과 자막 작업을 제대로 해줬다면, 검수 단계에서는 영상을 쓰윽 보면서 '실수' 한 두개만 잡아내면 됩니다. 그런데 앞에서 이 두가지 작업을 엉망진창으로 해 놓았기 때문에(피디 교체 전 상황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뒤에서 제가 영상을 초단위로 살피며 수백개의 실수를 잡아내야 합니다. 그러니 다섯시간이면 끝날 일을 15시간 가까이 종일 신경을 곤두 세우며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관점을 달리 해보면 사실 또 화만 낼 일도 아닙니다. 앞에서 엉망으로 해 놓은 덕에 제가 먹고 살고 있는 것이니까요. 그래서 영상 검수 작업을 할 때마다 일의 기쁨과 슬픔을 동시에 느낍니다


ㄱㅅㄲ들 가만 안 두겠어! 하며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르다가도 그래도 덕분에 먹고 산다며 화를 삭입니다.온탕과 냉탕을 오갑니다. 문제는 이런 깨달음이 있다고 모든 일이 허허실실 넘어가지는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매번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그 자막 업체에 대해서는 언제나 불꽃같은 분노를 느낍니다.


그리고 오늘 그들이 저지른 실수는 꽤나 심각했습니다. 피디와 CG팀에서 애써 한 일이 다 날아가고 다시 처음부터 작업을 해야했던 것입니다. 만일 상황이 벌어지자마자 업체에서 '이번에 작업 과정을 오해해서 실수를 한 것 같다. 죄송하다' 이렇게 말을 했다면, 화는 나겠지만 사람이 하는 일이니 그럴 수 있지, 하는 마음이 더 크게 작용했을 겁니다. 그런데도 업체에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번엔 다른 식으로 작업을 해서 결과물이 좀 다를 수도 있다


사과를 하는 대신 말 장난을 치며 미꾸라지처럼 슬슬 빠져나가려고 한 것입니다. 바로 그 태도가, 저를 몹시 분노하게 만들었습니다.


2. 분노의 권한

하지만 프리랜서들은 분노를 표현할 권한이 없습니다. 누가 일을 엉망으로 해서 결과물의 품질이 떨어진다 하더라도 그게 나한테 직접적으로 피해를 주지 않는 이상 모르는 척 지나가는 게 낫습니다. '이건 이렇게 하셔야 되는데..' 라고 말해봤자 상대방은 당신 말을 듣지 않습니다. 당신은 아무 권한이 없는 프리랜서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성질대로 '당신 왜 이딴 식으로 했어?' 라고 했다간 '당신은 뭔데 그딴 식으로 말해?' 하는 소리가 날아들기 딱 좋습니다. 당신은 권한 없는 프리랜서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프리랜서로 일을 하다보면 점점 회피형 인간이 되어갑니다. 그 편이 생존에 유리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분명히 하셔야 할 것은, 누군가 일을 엉망으로 했을 때 그것을 비난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정직원들뿐이라는 사실입니다. 프리랜서들은 정직원들이 물을 때에만, '저자가 이러저런 실수를 해서 우리가 이러저런 일을 다시 해야하고, 그래서 납품은 이래저래 늦어질 거다' 라고 감정없이 아뢰야 합니다. 내 책임이 아니라는 것만 밝히면 됩니다.


만일 프리랜서 주제에 주인의식을 가지고 있어서 일의 완성도를 높이겠다고 여기저기 들쑤시고 다니면 나댄다고 욕먹기 딱 좋습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프리랜서는 주인의식을 가지면 안 됩니다. 주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3. 미치광이 프리랜서

하지만 저는 프로페셔널한 프리랜서가 아닌 탓에 자꾸 주제도 모르고 주인의식을 가지려합니다. 또 직업이 직업인지라, 감정 없이 사람을 대하지도 못합니다. 그래서 이런 실수를 하게 된 것이라고 지금 변명을 하는 겁니다.


문제의 업체 이름을 '스머프'라고 하겠습니다. 이번에는 스머프가 대형 실수를 저지르는 바람에 CG팀과 피디가 한 작업이 날아가서 처음부터 일을 다시 하게 됐다고 서두에 말씀 드렸습니다. 피디는 짜증스런 마음에 제게 우는 소리를 했고, 저는 그 짜증에 십분 공감하여 피디에게 일곱 글자로 답톡을 보냈습니다


미치광이 스머프


그런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답톡은 전체 단톡방에 올라가 있었습니다. 스머프 팀장까지, 총 10명이 있는 업무 단톡방이었습니다. 머릿속이 아득해진 저는 반사적으로 카톡을 지웠습니다. 지울 때 보니 제가 쓴 카톡 앞에는 8이라는 숫자가 써 있습니다. 단톡방에 있는 열명 중에서 저를 빼고 나머지 9명 중 그 카톡을 본 사람이 딱 한 명 밖에 없다는 뜻이었습니다.


저는 러시안 룰렛을 하는 심정으로 그 한 명이 부디 스머프 팀장이 아니길 바랐습니다. 하지만 이런 경우 언제나 그 한 사람은 제발 안 보길 바랬던 그 사람입니다. 바로 스머프 팀장의 톡이 올라왔습니다.


말씀이 너무 지나치신 거 아닌가요?


왜 하필 너냐고 땅을 치고 후회해 봤자 총알은 이미 발사된 후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 모든 일이 악마의 짓이라고 생각했던 겁니다. 하지만 악마같은 것이 있을 리 없습니다. 다 제가 잘못한 일이지요. 굳이 악마를 찾아야 한다면, 제 손구락이 악마였다고 할까요?


저는 납작엎드려 공개적으로 사과를 했고 개인적으로도 사과를 했습니다. 그리고 다음날에도 절절한 사과의 문자를 보냈습니다. 여기서 열 한번째 생존전략을 말씀드리면, 단톡방에 실수를 했으면 신속하게 사과를 하는 것이 좋습니다.


첫 번째는 제가 잘못을 했기 때문이고, 두 번째는 그렇게 해야 두 대 맞을 거 한 대 맞고 끝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스머프 팀장은 그동안 저로부터 먹은 욕에 대한 씻김굿이라도 할 셈인지, 제 사과 문자를 전부 무시했습니다. 대신 그쪽 업체 이사가 우리 부서 부장을 찾아와 저에 대해 강력히 항의를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저는 지금 납작 엎드려 지내는 중입니다. 앞으로는 스머프가 일을 엉망진창으로 해서 보내도 저는 묵묵히 감수작업을 해야 할 것입니다. 돌아보면 이것은 아마, 프리랜서 주제에 나대지말라는 하늘의 응징이었는지 모르겠습니다. 혹은 이참에 프로페셔널한 회피형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라는 뜻이었을까요? 어쨌든 말조심, 아니 손가락 조심을 해야겠습니다.




프리랜서의 생존전략 No. 11

악마는 없다.
단톡방에서 말 실수 했으면 신속하게 사과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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