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직 방송작가의 살아남는 법에 대한 이야기
안녕하세요, 노파입니다
앞에서 회사 단톡방에 큰 실수를 한 이야기를 해드렸습니다. 그 일은 제가 사과를 하고 상대방이 제 사과를 무시하는 선에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꽤나 파장이 컸습니다. 해당 업체의 이사가 우리 부서 부장을 직접 찾아와 항의를 했다고 합니다. 항의의 요지는 자신들이 갑질을 당했다는 것이었습니다.
갑질이라니요.. 프리랜서는 갑을병정무기경신임계의 가장 말단에 속합니다. 유일한 장점이 바로 갑질 논쟁에서 자유롭다는 점입니다. 물론 프로그램의 향방을 좌지우지하는 1%의 방송작가들에겐 해당되지 않는 이야기겠지만, 99%의 방송작가들에겐, 거기다 사업자도 내지 않은 제겐, 완벽하게 적용되는 이야기입니다. 어느 을에게 붙여놔도 결코 밀리지 않을만큼 권력 서열 최하위 프리랜서인 제가 갑질이라니요, 당치도 않습니다.
이런 사정 때문에 업체 이사의 갑질 항변은 아무 효력이 없었습니다. 업무는 엉망진창으로 해서 번번이 말썽을 일으켜놓고, 이럴 때만 부장을 찾아가 항의를 하는 것 자체가 그가 얼마나 힘이 센 을인지를 보여줍니다. 그런 사람이, 사업자도 없는 개인 프리랜서에게 갑질이 당했다는 것은 개념 자체가 성립되지 않습니다. 부장은 그 점을 짚었고, 또 그들이 그간 업무를 형편없이 해왔다는 사실도 짚었습니다. 그러자 이사는 다시 설설 웃으며 돌아갔다고 합니다. 아무리 힘센 을이라도 방송국과의 관계에선 저와 다를 바 없으니, 그저 비굴하게 웃을 수밖에 없습니다.
여기서 '역시 정직원이 최고구만' 하고 결론을 내기에는 아직 이릅니다. 은퇴 후 정직원들이 기웃거리는 곳이 바로 이런 업체이기 때문입니다. 그때가 되면 이번엔 부장이 비굴하게 웃으며 업체 대표에게 잘 봐달라고 할 겁니다. 돌고 도는 먹이사슬입니다.
그러든저러든 먹이사슬 최말단에 있는 저로서는 당장 다음 계약을 걱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일은 정확해도 성격이 더럽고, 단톡방에 말실수까지 하는 프리랜서를 고용주님이 좋아할 리 없기 때문입니다. 방송국에서는 일은 좀 못하더라도 고분고분하게 말을 잘 듣는 프리랜서를 훨씬 선호합니다.
프리랜서 생존전략 No.15
일을 잘하는 것 이상으로
정직원들과 관계를 잘 닦아놓을 것!
그러나 저는 부장과 관계가 좋지 않습니다. 오히려 저는 부장을 미워합니다. 일을 시키는 사람이 일의 내용은 하나도 모르고, 업체 관리까지 저한테 떠넘기다시피하는 태도에 짜증이 났기 때문입니다. 부장 역시 이 사실을 모르지는 않을 겁니다. 싫은 것은 티가 나는 법이니까요. 게다가 이번에 대형 사고까지 쳤으니.. 계약 연장은 바라면 안 되겠다고 내심 생각했습니다. 그럼 이제 은행 대출금은 어떻게 갚지? 골머리를 앓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차에 부장이 제게, 지금 다른 일을 기획 중인데, 그 일도 해보지 않겠냐고 이야기를 꺼냈던 겁니다. 물론 말만 던지고 언제 그랬냐는 듯 입 싹 닦는 일도 부지기수지만, 어쨌든 저와 계속 일을 하고 싶다는 마음을 보여줬다는 게 중요합니다. 저는 그 점이 의아했습니다. 이 모든 리스크에도 불구하고 부장은 왜 내게 계속 일을 맡기고 싶은 것일까?
제 이야기를 전해 들은 친구가 가장 그럴싸한 해설을 해주었습니다
그 사람은 아마 미치광이가 필요한 걸꺼야,
자기가 직접 미치광이 노릇을 할 순 없으니깐
그 얘기를 듣자마자 저는 무릎을 탁, 쳤습니다. 아하, 들개의 목줄을 쥐고 싶은 게로군!
누군가의 개 노릇을 하는 것은 모욕적이지만 들개라면 이야기가 다릅니다. 들개는 멋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개면 또 어떻습니까? 모두가 자본주의의 개로 살고 있는 마당에 말이지요. 개든, 들개든, 저는 이제부터 글을 썼다고 돈을 주는 사람은 다 주인님으로 모실 생각입니다. 오늘 밤에는 달을 보며 하울링을 좀 해야겠습니다
아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