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직 방송작가의 살아남는 법에 대한 이야기
안녕하세요, 노파입니다
어느 모임에서든, 직업이 뭐냐고 물었을 때 방송작가라고 답하면 다들 흥미로운 눈으로 쳐다봅니다. 방송국이라는 곳에 대한 환상과 글쓰기로 밥벌이를 한다는 것에 대한 놀라움이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저는 사람들이 흔히 기대하는 연예인 이야기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해드릴 수 없습니다. 아쉽게도 제가 쓴 글들은 다큐멘터리 내레이션, 법률방송 원고, 라디오 극본이기 때문입니다. 미안합니다. 그러나, 글쓰기로 밥벌이를 한다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조금은 이야기를 해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것은 한 마디로 말하면 험난한 일입니다. 쓰면서도, 진짜 이걸로 밥을 벌어먹고 살 수 있는 것인가? 하고 3, 4년 의심하다보면 돌이키기엔 어느새 꽤 멀리 와 있습니다. 그러나 배운게 도둑질이라고 다시 또 꾸역꾸역 쓰게 됩니다.
사실 이십대 후반에만 들어왔어도 3, 4년 의심해봤자 서른 안팎의 나이일텐데, 저는 놀랍게도 서른 두 살에 방송작가가 됐습니다. 3, 4년 의심하고 돌이키려 했더니 마흔이 목전이다, 그 말입니다. 그래서 그냥 가는 것입니다. 계속 의심하면서 말이지요.
1. 메인작가가 나를 싫어한다면?
그러나 저만 제 역량을 의심했던 것은 아닙니다. 방송작가가 되고 처음 팀 메인작가와 만난 자리에서 저는 이런 얘기를 들었습니다
계속 하지도 않을 애를 뽑으면 어떡해?
다른 작가한테 갈 수 있는 기회를 뺐은 거잖아!
이게 얼마나 좋은 기횐데!
당시 저를 뽑은 것은 피디였고, 메인작가는 피디를 향해 이 말을 했으나, 실은 제가 들으라고 한 말이었습니다. 여기서 재밌는 사실은, 나중에 정말 도망간 사람은, 제가 아니라 바로 그 메인작가였다는 점입니다. 철학 관련 다큐멘터리였는데, 메인 작가는 도저히 구성이 안 된다는 이유로 준비한지 9개월이 되는 시점에서 잽싸게 도망을 가버렸습니다. 실컷 저를 욕하고 정작 본인이 내빼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화도 나고 어이도 없었습니다.
애초에 처음 방송작가로 들어온 사람이 계속 이 일을 할 사람이라는 인상을 줄 필요는 없습니다. 메인작가마저 도망가는 판이니, 보조작가 도망치는 일은 부지기수입니다. 대체할 작가 역시 부지기수입니다. 윗돌 빠지면 아랫돌로 괴면 됩니다. 그러니 보조작가 하나 도망가는 것쯤은 방송에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계속 하지도 않을 것처럼 보인다'고 시비를 걸은 것을 보면 그 메인작가는 그냥 제가 싫었던 겁니다.
만일 처음 들어간 제작팀에서 메인작가가 자신을 싫어한다면, 앞날이 캄캄한 거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사사건건 시비를 겁니다. 그 메인작가는 회의시간에 제가 무슨 말만 하면 그건 너무 교조적이라고 퉁을 놨고, 말을 안 하면 안 한다고 시비를 걸었습니다. 그럴 땐 침 한 번 퉤뱉고 버티든가, 한 번 뒤집어버리고 버티든가, 그것도 아니면 그냥 도망가 버리면 됩니다. 저는 첫 번째 방법을 택했고 지금 저와 그 메인작가는 딱히 나쁠 것도 없는 사이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아마 영원히 좋은 사이는 될 수 없을 겁니다. 그런 말들은 오래도록 가슴에 남기때문입니다.
2. 작가들은 자신의 글쓰기 실력에 확신할까?
사실 작가 중에 확신을 갖고 원고를 쓰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쓸 때마다 이런 의심이 들기 때문입니다.
내가 정말 재능이 있는 건가?
특히 저는 구성작가 일을 하면서 스스로를 작가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습니다. 작가는 무슨! 그냥 개인사업자라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하는 글쓰기가 그저 먹고 살려고 굴리는 시지프의 바위덩이처럼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스스로의 글쓰기 능력을 의심하며 때려쳐야 되는지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을 때 우연히 이런 말을 듣게 됐습니다.
잘 쓰시네
계속 쓰세요
다음엔 TV도 꼭 써보시고요
제 라디오 극본에 출연했던 70대 노배우의 말이었습니다. 노배우는 집으로 가려다 말고 굳이 발길을 돌려 제게 오더니 저런 말을 해줬던 겁니다. 이런 말 또한 오래도록 가슴에 남는 법입니다.
신춘문예에 떨어진 후(저는 정말 온갖 글을 다 씁니다) 다신 소설 같은 것은 쓰지 않겠다고 이를 갈고 있을 때는 이런 말도 들었습니다.
또 쓰게 될거야
너는 써야 되는 사람이거든
저런 애를 왜 뽑았냐는 말을 들은지 7년쯤 지난 후에 듣게 된 말들입니다. 이런 말들이야말로 기억에 오래 남는 법입니다. 그리고 계속 쓰게 하는 동력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요즘은 어디가서 저를 작가라고 소개해도 조금은 덜 부끄럽게 느껴집니다. 그 전엔 꽤나 부끄러웠습니다. 20년차 작가에게 그런 말을 듣고 일을 시작하면 모든 것이 부끄러워집니다.
그렇다면 지금은 의심을 안 하는가 하면 또 그런 것도 아닙니다. 얼마 전에 넘긴 라디오 극본은 다시 보니 쓰레기 같고, 지금 쓰고 있는 TV극본은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수준입니다. 이런 걸 한 번 봐달라며 친구에게 보냈다는 사실 부끄러워 죽을 지경입니다. 부끄러운 생각을 떨치기 위해 미친듯이 오븐을 닦다가 손을 베기도 했습니다
아마 환갑이 넘어도 부끄러움에 스스로 손을 베어가면서도 계속 글을 쓰고 있을 것 같습니다.
방송작가 생존전략 No. 16
계속 의심하며 쓸 것
그리고,
말을 조심할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