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그래도 싸워야겠다면.. 제대로 싸우자

현직 방송작가의 살아남는 법에 대한 이야기

by NOP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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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노파입니다.


프리랜서는 자존심을 세우면 안 된다고 누누히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어떤 때에는 이것도 그냥 지나가면 내가 버러지다, 싶은 순간이 찾아옵니다.


1. 방송국에서 선을 세게 넘었다면

예를 들어, 구두 계약을 다 끝내놓은 업무가 아예 무산됐는데도 한 마디 설명이 없었다든가, 아니면 월 얼마씩 받기로 계약서를 다 작성해놓고서는 역시 말 한마디 없이 원고 건수를 1/3로 줄여 월급도 1/3 토막이 났다든가, 하는 식의 일이 벌어졌을 때입니다


슬프게도 이런 일들은 방송국에서 심심찮게 벌어집니다. 미리 말씀을 해주시면 좋았을 텐데요~, 하고 좋게좋게 한 마디하면 또 지나가지는 일입니다. 그런데 이런 일이 한 달 사이에 연달아 발생하면, 미안하단 말도 한 마디 없었다면, 좋게좋게 웃으며 말이 나오지가 않습니다. 생계가 흔들리는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런 일들은 한 번만 발생해도 당장 다음달 대출금부터 카드값까지, 나가야 될 돈들을 어떻게 마련할지 고민이 앞서기 마련입니다. 정규직들에게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담당자들은, 이런 일이 벌어져도 프리랜서에게 말 한 마디 하지 않습니다.


그래도 한 번 정도야, 돈 메꿀 구석을 마련하는 일이 아주 어렵지는 않지만, 이런 일이 연달아 발생한다면 내가 이 일을 하느라 포기했던 다른 일들이 떠오릅니다. 그러나 그 일의 신청 기간은 이미 지나버렸고, 달리 돈 나올 구멍도 없습니다. 대체 월급이 1/3 토막이 나는 일을, 아니, 아예 일 자체가 무산된 사실을, 두 번씩이나 말을 안 해준 것에 대해서는 짚고 넘어가는 것이 맞습니다. 안 그러면 지금처럼 생계가 흔들리는 상황이 앞으로도 계속 발생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애초에 이런 일이 연달아 발생했다는 자체가, 담당자가 어떤 사람인지를 말해줍니다. 그는 프리랜서의 생계 따윈 내 알 바 아니라는 식의 태도를 지닌 사람일 것입니다. 아니면 단순히 불편한 상황을 피하기 위해 해야할 일을 하지 않는, 소극적으로 이기적인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뭐가 되었든, 이야기가 좋게 끝날 가능성은 높지 않습니다. 제 경우엔 더 나빴습니다. 왜 이런 중요한 변동사항을 미리 이야기를 안 했냐고 문제제기를 하자 담당자가 짜증을 내며 "당신의 이런 문제제기가 피곤하다"고 말했던 것입니다.


아무리 프리랜서가 가만가만 가마니 참고참고 참깨라고 하지만, 이런 순간조차도 그냥 지나간다면, 마치 제 자신이 버러지가 되는 것 같아 견딜 수가 없어집니다. 그러나 이런 순간에도 "앗, 감히 프리랜서 따위가 정규직 직원님을 피곤하게 해드려 죄송합니다" 라고 말할 수 있는 강철 멘탈을 가지신 분이라면 좋게좋게 넘어가시는 것도 한 방법일 겁니다. 그러나 그런분들조차도 어느 순간엔 넘을 수 없는 선을 마주하게 될 날이 오게 돼 있습니다.


바로 지금이 그 순간이라면, 그래서 한바탕 살풀이를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면, 싸울 땐 제대로 싸우셔야 합니다. 나는 이제부터 너네랑 일 안 한다, 하는 각오로 모든 싸움의 수단을 강구하셔야 합니다. 공식적으로 문제제기를 하는 순간, 이제 이 일은 담당자와 나, 둘 사이의 일이 아니라 계약의 주체인 방송국과 나와의 문제로 확대되기 때문입니다. 즉 앞으로 이 방송국과 다시 일하는 것이 어려워질 것임을 의미합니다.


2. 프리랜서가 업체와 싸우는 방법

프리랜서는 근로기준법의 적용을 받는 노동자가 아니기 때문에 노동청 이외의 루트를 통해 싸움을 진행해야 합니다. 또한 많은 경우 프리랜서의 노동분쟁은 갑질과 연관돼 있기 때문에 공정거래위원회, 법률구조공단, 권익위 등 다양한 정부 기관에서 갑질 관련 민원 상담을 받으시는 것이 좋습니다. 물론 여기저기 민원을 넣어도 기관에서 민원을 이관시키면 결국 한 군데에서 처리하게 되지만, 일단 여러군데 뿌려두면 다양한 답변을 들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러면 저도 보다 다양한 조처 방법을 생각해볼 수 있기 때문에 정성스럽고 집요하게 민원을 넣어야 합니다.


방송작가의 경우엔 앞에서 말씀드린 기관들 외에도 방송국 감사실, 작가 노조, 예술인 복지재단 등에도 연락해 자문을 받을 수 있습니다. 제 경우엔 민사를 진행할 것에도 대비해 노동전문 변호사에게도 상담을 받았습니다. 법률구조공단에서도 변호사가 답변을 주긴 하지만, 시간이 오래 걸리고 아무래도 형식적으로 업무를 처리하는 감이 있어 소송을 생각한다면 사설 노동 전문 변호사에게도 문의를 하는 것이 좋습니다. 상담 비용이 비싸지 않고 무엇보다 이 싸움으로 제가 얻을 실익이 있을지 여부를 정확하게 판단받을 수 있기 때문에 꼭 소송이 아니더라도 노동 전문 변호사 상담을 추천드립니다.


이런식으로 한편으론 민원과 상담을 받으면서 다른 한편으론 현재 진행되는 상황을 분쟁의 당사자인 담당자에게 알려야 합니다. 지금 너를 갑질로 감사실과 권익위에 신고했고 외부기관에서도 자문을 받고 있고 너의 부서장에게도 알렸다, 하는 식으로 말입니다. 그리고 이때부터 모든 소통은 카톡과 메일로 합니다. 그럼 담당자가 아뿔싸! 하고 꼬리를 내리든지, 니까짓 게 한 번 해볼테면 해봐! 하고 발끈하든지 둘 중 하나의 반응을 보입니다. 제 경우엔 후자였습니다. 그래서 그 반응 역시 갑질의 증거라며 감사실에 보냈고 이 사실 또한 담당자에게 고지했습니다.


3. 프리랜서 노동 분쟁의 결론

싸우기로 마음을 먹었다면 적극적으로 모든 수단과 방법을 강구해야하지만, 결론에 대해서도 항상 염두에 두셔야 합니다. 많은 경우 이런 일의 결론은 '이렇게 해봤자 별 실익이 없다' 로 귀결됩니다. 얼마 전에도 SPC 하청 공장에서 23살 청년이 산 채로 기계에 잡아먹혔습니다. 작년 한 해에만 828명의 사람들이 산재로 죽었습니다. 이렇게 매일 두 명씩 사람이 일하다가 죽어나가는데도 제대로 사과하는 사람도, 제대로 처벌하는 사람도 없는 나라입니다. 그런 나라에서, 직원의 "피곤하다"는 말 한마디가 대단한 갑질이라고 인정받기는 어렵습니다. 그 과정에서 있었던 구두계약 불이행이라든지, 월급 1/3토막에 대한 계약 위반은 법원에서 인정받기 어렵습니다. 인정된다 하더라도 대단한 처벌도, 별다른 보상도 없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여러 기관에서 받은 자문 결과 역시 결론과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방송국 감사실은 기본적으로 정직원의 편이었고, 변호사는 녹취록이나 계약서 같은 구체적인 증거가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구두 계약이었으니 계약서가 있을리 없었고, 아는 사람들끼리 회의하는 내용을 전부 녹취를 하고 있을만큼 저는 이상한 사람이 아닙니다. 무엇보다 월급이 떼인 것도 아니고 단순히 일거리를 계약한 것보다 덜 준 것이니, 그 덜 준 양이 비록 1/3토막이라고 해도 법적으로 크게 문제삼기 어렵다고 했습니다.


구두계약까지 다 해놓은 것을 말 한마디 없이 없던 일로 해버리고, 계약서에 명기된 내용에서 원고 건수를 70%나 삭감해도 법적으로 별 문제가 안 된다고 하니, 문제 제기에 피곤하다고 말한 것도 갑질이 아니라고 하니, 프리랜서는 그저 이가 갈립니다. 고료라도 많이 준다면 돈벌레로 사는 셈치고 치나가겠지만, 이런 경우 대체로 돈도 많이 안 줍니다. 그러면서 사람을 버러지 취급을 하니, 싸우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습니다. 프리랜서는 돈벌레는 받아들여도 그냥 벌레는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 살 깎아먹기나 다름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싸움을 시작합니다.


4. 분쟁 중 멘탈 관리

글은 쿨하게 썼지만, 사실 이 일을 진행하는 내내 마음이 편치가 않았습니다. 제 마음 속에는 투지도 있고, 분노도 있고, 무엇보다 옳은 일을 하고 있다는 명분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의 잘못을 고발하고, 그로인해 내 생계가 더 위태로워지는 결과를 생각하니 매순간 마음이 요동을 칩니다. 불안하고 심란하고 초조한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보냅니다. 프리랜서의 노동 분쟁이 특히 힘든 이유는 노조의 도움을 받지 못하고 홀로 고립되어 싸움을 진행해야 하기 때문입니다.(방송작가들에겐 노조가 있긴 하지만 노조비가 부담스러워 가입을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럴 땐 인간적인 마음을 넘어설 수 있는 것들, 즉 명상과 금강경, 아니면 성경을 읽고 108배를 하면서 마음을 다 잡으시길 바랍니다.


저 역시 금강경을 필사하면서 최후의 공격 카드를 고민했습니다. 사실 분쟁 중에 가장 효과적으로 멘탈을 관리할 수 있는 방법은, 끊임없이 공격 포인트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제가 찾은 공격 포인트는 이 방송국을 눈엣가시로 여기는 국회의원실과 이 방송국의 돈줄을 쥐고 있는 방통위에 갑질 제보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또한 당장에 흡족할만한 결과를 보여주진 않겠지만, 언젠가 이 방송국이 어떤 식으로든 크게 터질 미래의 그 순간이 오면 지금 제가 보낸 제보 한 통이 단단한 밑거름이 돼 줄 것입니다. 농부가 여름을 기다리며 봄날 작은 씨앗을 뿌리는 마음으로 5년 후, 혹은 10년 후에 올 그날을 위해 정성껏 제보 메일을 썼습니다. 그날이 오면, 이 모든 일이, 남의 생계를 흔들어 놓고 씹던 이쑤시개를 뱉듯 '피곤하다'고 던진 한 마디에서 시작된 것임을, 김과장이 알게 되면 좋겠습니다. 그리하여 생계가 흔들린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김과장 또한 절절하게 경험하면 좋겠습니다.


5. 분쟁 결과

그렇게 정성껏 제보글을 쓰고 있는데 메일이 한 통 날아왔습니다. 김과장이었습니다. 이제부터 다른 사람이 저와 소통하게 될 건데, 계속 일을 할 의향이 있는지 묻는 내용이었습니다. 감사실에 끌려다니고 사내 변호사사를 찾아다니는 꼴을 보니, 그냥 담당자를 바꾸는 편이 낫겠다고 위에서 결정을 내린 모양입니다. 저는 문제 없다고 답메일을 보냈습니다. 그러면서 지금까지의 일들은 더 좋은 결과를 위해 서로 바닥을 다지는 시간이었다고 생각하자는, 쿨병 걸려 뒤진 사람의 말도 덧붙였습니다. 현재는 바뀐 담당자의 친절한 설명을 들으면서 계약 기간을 마무리하는 중입니다만, 앞으로 이 부서와 다시 일 할 일은 없을 겁니다.




프리랜서 생존전략 No. 21

그럼에도 불구하고 싸우겠다면,
앞으로 이 회사와는 일 안 한다고 생각하고
구체적이고 집요하게 물어뜯을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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