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숟가락은 어떻게 얹어야 하는가

현직 방송작가의 살아남는 법에 대한 이야기

by NOP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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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노파입니다


모든 프리랜서들이 그렇듯, 방송작가로 일을 하다보면 불합리한 경우를 숱하게 만나게 되는데, 그중 이건 진짜 내가 왜 해야하는지 모르겠다, 싶은 일이 바로 기획안 작성입니다. 드라마 작가라면 기획안을 작가가 쓰는 것이 이해가 되는 부분도 있습니다. 어떤 아이템으로 어떤 성격의 드라마를 만들 것인지, 구체적인 구성과 플롯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은 작가이기 때문입니다.


1. 프로그램 기획과 기획료

하지만 교양 프로그램은 다릅니다. 보통 방송국에서 이런 아이템으로 한 번 해보라고 피디에게 던져주면, 피디는 작가와 함께 이야기를 하면서 내용을 구체화시킵니다. 그리고 그 내용을 바탕으로 피디가 기획안을 써서 상부에 결재를 올리게 되죠. 아니면 자기가 이미 결재를 받은 기획안으로 프로그램을 같이 할 작가를 추후에 찾기도 합니다. 그것도 아니라면 처음부터 기획 작가를 고용해 비용을 합당한 비용을 지불하고 기획안을 쓰게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교양 프로그램은 피디가 프로그램의 성격과 시청자층을 결정하기 때문입니다. 작가가 그저 지나가는 걸로 '이런 거 한 번 해보면 어때요?' 하고 의견을 제시할 수는 있어도 그것을 최종적으로 구체화하고 결정하는 것은 피디입니다. 때문에 기획안은 피디가 쓰는 것이 맞고 만일 작가에게 기획안 작성을 맡겼다면 위의 경우처럼 비용을 따로 지불해야 합니다.


하지만 과거에는 프로그램 아이디어부터 기획안 작성까지 전부 작가에게 맡기면서 기획료도 안 주는 일이 비일비재했습니다. 나중에 이 프로그램 작가로 써준다는 것을 빌미로 얼렁뚱땅 넘어가는 것입니다. 하지만 기획료는 받으시는 게 맞습니다. 기획안의 분량이 매우 적거나, 고료를 만족스런 수준으로 제시하여 생존의 지혜를 발휘하는 차원에서 적당히 넘어가는 것이 아니라면, 기획비는 요구하시는 게 맞습니다.


참고로 저도 방송국에서 기획 작가로 일해본 적이 있습니다. 두 달간 4개의 프로그램을 기획했는데 결과적으로 한 개도 제작되지 않았습니다. 하나는 제작비가 너무 많이 들었고, 다른 하나는 제작 기간이 너무 길었습니다. 나머지 두 개는 아마 재미가 없었던 것 같습니다. 제게 교양 프로그램을 기획하는 능력이 없다는 것을 그때 알았습니다. 그래도 기획료는 3년차 작가의 한 달 고료 수준으로 받았습니다. 무능한 기획작가를 고용한 것은 그쪽 사정이고, 어쨌든 일을 시켰으니 급여는 줘야하는 겁니다.


2. 강의방송 워크북도 방송작가가 만드는 거라네

그런데 이번에 제가 참여하는 교양 프로그램은 성격이 조금 독특합니다. 제작진이 만들어 놓은 강의 프로그램을, 해외에 수출할 수 있도록 글로벌 콘텐츠로 재제작하는 일입니다. 시청률 부담도, 아이템 발굴 부담도 없다는 대신 피디를 이제 갓 입봉한 프리 피디로 붙여주었습니다. 이렇게 되면 업무상 문제가 생겼을 때 피디와 소통을 해도 해결을 할 수가 없습니다. 프리 피디는 저와 같은 프리랜서 신분이라서 아무런 결정권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잘한 결정이 필요할 때마다 우리 부서 김과장과 소통을 해야 했는데, 문제는 그녀가 방송 제작을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행정 인력이라는 사실입니다. 저도 방송국 행정직원으로 일해 본 경험이 있어서 잘 압니다만, 이들은 피디나 작가와 같은 제작 인력과 전혀 다른 종류의 방송국 인력입니다. 제작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지 못합니다. 방송국 직원이어도 일반 회사원과 비슷하다고 보시면 됩니다. 그래도 지금까지는 김과장이 피디와 제가 제안하는 방향에 특별히 반대하는 일이 없었기 때문에 문제 없이 일이 진행되었습니다.


그러던 차에 김과장이 제게 프로그램 워크북을 만드는 것이 어떻겠냐고 물었습니다. 영상보다 활자를 더 좋아하는 저로서는 거절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하겠다고 했습니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습니다. 제 승낙 의사를 듣자마자 차장이 제게 워크북 샘플을 만들어 달라고 한 것입니다. 그 순간 제가 왜 일반회사를 도망쳐나와 프리랜서가 됐는지, 그 이유가 떠올랐습니다. 바로, '윗사람 떠받들기와 아랫사람에게 떠넘기기'의 업무 방식을 견딜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3. 일반 회사에서 일은 어떻게 돌아가는가

업무 방식은 일반 회사와 다를 것 없는 이 부서에서도 일은 그렇게 돌아갔습니다. 그러니깐 이런 식입니다. 먼저 정규직끼리 하는 1차 회의에서 새로 부장으로 승진한 김방구 부장이 말합니다.


"우리 프로그램에서 뭘 더 해야 사장님이 좋아하실까?"


그리고는 곧바로 자기가 답을 내놓습니다.


방송국 홈페이지에 방송 영상만 올리지 말고
프로그램 워크북도 함께 올리는 건 어때?!


아이디어랄 것도 없습니다. 우리가 이미 샘플로 베끼고 있던 해외 사이트에서 현재 제공 중인 서비스를 또 베끼는 것 뿐이니까요. 그러나 과장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위대하신, 위대하신!" 을 외치며 열렬히 호응합니다. 이곳에선 사회생활이 필수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문득, 자신이 워크북 기획을 떠맡게 될 것을 직감한 김과장이 질문을 합니다.


"그럼 워크북은 어떤 컨셉으로 만들까요?"



위대하신 부장님이 미간을 잠시 찌푸리더니 이내 대답합니다.



그건.. 김작가 시키면 되지!



그리하여 워크북 기획 업무가 저에게로 내려오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하겠다고 했을 땐 창자까지 내보여줘야 진정한 프리랜서 입니다. 저는 김과장에게 원하는 컨셉이 있는지 물었습니다. 김과장이 대답합니다. 강사 이력도 요약해 주시고, 강의 내용도 요약해 주시고 등등. 하지만 그것은 컨셉이 아닙니다. 그저 워크북이라는 교재의 정의를 되풀이한 말에 불과합니다. 그러더니 김과장은 덧붙입니다.


그러면서도 작가님의 개성이 드러나게 써주세요!


이 또한 정답이 아닙니다. 워크북 같은 학습 교재의 목표는 강의 개념을 명확하게 드러내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글쓴이의 개성은 최대한 지워야합니다. 거기다 제 이름이 저자로 올라가지도 않습니다. 제가 개성을 드러낼 이유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제 질문에 대한 정답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위대하신 우리 김방구 부장님 입맛에 맞게 해주세요!



이것이 모든 상품 컨셉의 답입니다.


그리하여 저는 우리 김방구 부장님이 어떻게 하면 함박 웃음을 지을 수 있을지 고민을 거듭했고, 그래도 기획작가로 일한 경험이 영 허투루 보낸 시간이 아니었는지 저는 적당한 컨셉을 잡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보낸 기획안을 보신 김방구 부장님 샘플 교재를 집어들고 이렇게 말했다고 전해집니다.


나 이거.. 아주 잘 하고 싶어


말인즉, 작가를 더 쥐어짜라는 얘기입니다. 그러나 저는 기획료도 안 주는데 더 아이디어를 낼 생각이 없었고 김과장도 딱히 무얼 더 수정을 요청해야할지 알지 못해 우리는 거의 처음 기획한 내용 그대로 워크북을 만들기로 했습니다. 그리하여 그 교재를 교육부에도 돌리고 학교에도 돌리고 전국 방방곡곡으로 돌리기로 한 것입니다.


4. 김방구 부장은 왜 워크북을 책으로 발간하고 싶었나?

저와 회의를 하던 중에 김과장이 무심코 말합니다. "부장님은 이걸 왜 책으로 만들겠다고.." 김방구 부장님의 말에 열심히 박수는 쳤지만 과장은 싫을 수밖에 없습니다. 월급을 더 주는 것도 아닌데 일이 늘어났기 때문입니다.


과장은 점심을 먹으면서도 되뇌입니다. "굳이 왜 책으로 만들겠다고..." 편한 자리니 제가 그 이유를 알려줍니다


이건.. 이명박의 청계천과 같은 거예요


모든 일은 일단 눈에 보여야 '저거 누가 한거야?' 소리가 나옵니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김방구의 이름이 나올 것입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워크북이 온라인에만 있으면 안 됩니다. 무조건 책으로 나와서 온 세상 교사들의 책꽂이에 꽂혀 있어야 하는 겁니다.


그런 목적이라면, 책 표지에 위대하신 김방구 부장님의 이름을 크게 써놓을까? 잠시 고민도 해봅니다. 하지만 칭찬은 쓰리 쿠션으로 듣는 것이 가장 아름다운 법입니다. 남들이 "이거 누가 한거야?" 라고 물어서 또 다른 누군가가 "김방구 부장이 한 거잖아!" 하고 답하는 모양새가 가장 아름다운 것이지요.


5. 정규직들의 숟가락 얹기 전쟁

문득 이 프로그램을 직접 제작한 피디가 생각났습니다. 그는 프로그램 기획을 짜고, 강사를 섭외하고, 밤새 촬영하고, 편집하고, 죽도록 고생하다가 점점 산화되어 갔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개편 시즌이 다가오자 위에서 그를 다른 부서로 발령을 보내버렸습니다. 그의 공적이 눈에 띄게 커지자 밥상에서 그의 숟가락을 빼버린 겁니다. 그리고 그 빈자리에, 김방구가 워크북 하나 들고와서 자기 숟가락을 얹으려 하고 있습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여기서 그가 한 일이라곤, 나 이거 잘하고 싶어, 이 한 마디를 뱉은 것 뿐입니다.


하지만 괜찮습니다. 우리 방송국의 '얹어가기 최고봉'이 그를 가만두지 않을 테니까요. 그는 바로 우리 사장님입니다. 이 프로그램의 일등공신을 그냥 날려버린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우리 사장님은 이 방송국에서 나온 모든 좋은 것들은 다 자기가 했다고 소문이 나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입니다. '유명한 사람 데려다가 강의 프로그램하면 좋겠다', 아마 이 정도 얘기를 했을 것입니다. 누구나 할 수 있는 이야기지요. 그러나 프로그램이 대박나는 순간부터 이것은 사장인 내가 기획한 프로그램으로 둔갑합니다. 칭찬의 가장 아름답지 못한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6. 프리랜서의 숟가락 얹기

그러든저러든 프리랜서는 상관없습니다. 밥상에 숟가락을 얹든 국자를 얹든 니들끼리 맛있게 해드세요, 저는 돈만 챙기면 됩니다. 그러나 그들이 제시한 고료가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요약만 하면 되는 일이라고 생각한 탓인지, 기존 고료의 70% 수준만 제시합니다. 하지만 기획료도 못 받고 부림을 당했는데 이런 대우를 받으면 분노의 딜을 하게 되는 법입니다.


받고 50프로 더


워크북 작업은 기존의 방송 원고를 쓰는 것과 성격이 전혀 다르고, 무엇보다 영어로 된 자료를 다뤄야 하기때문에 결코 작업이 쉽지 않습니다. 즉 대체 작가를 구하는 것이 어렵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배팅을 해도 됩니다. 과장은 난감한 얼굴을 했으나 달리 대안이 없던 터라 거래는 극적으로 성사됩니다. 이것이 프리랜서가 숟가락을 얹는 방법입니다.


말만 들으면 제가 마치 극강의 딜을 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과장이 처음에 너무 낮게 부른 탓에 생긴 착시효과일 뿐입니다. 실제로는 기존에 받던 것과 동일한 수준의 고료로 계약했습니다. 그러나 제가 선두에서 고료의 기준을 높여준 덕에 제 뒤로 들어오는 편집자, 북디자이너, 번역자들 또한 염가로 후려치기를 당하는 일이 없을 겁니다.


저도 이제 위대하신 김방구 부장님 찬가를 부르며 열심히 일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위대하신, 위대하신!!"



프리랜서 생존전략 No.20

프리랜서라면 돈으로 숟가락을 얹을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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