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발은 언제 정확한 표현이 되는가 2

[글쓰기 교실] #15. 어휘력 키우기

by NOPA


안녕하세요, 노파입니다.

지난 시간에는 욕을 입에 달고 사는 한 피디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https://blog.naver.com/nopanopanopa/222983635058


그 피디가 가진 근본적인 문제 역시 어휘력의 빈곤입니다. 욕설 외에는 자신의 화난 감정을 표현할 어휘가 없는 탓에 마치 언어를 갖지 못한 개가 짖어대듯, 조금만 성이나도 반사적으로 욕을 해대는 것입니다. ㅆㅂㅆㅂ 멍멍멍. 지금 그 분을 뵌다면 그러지 말고 제 글쓰기 수업을 들어보라고 진지하게 영업을 뛰겠지만, 그때는 수업을 하지 않았습니다. 아쉽습니다.


심리학 박사가 본, 씨발이 이끄는 삶

유명 심리학 박사가 쓴 <행복도 선택이다>라는 책에서도 폭력 범죄로 수감된 재소자들 대부분이 감정을 표현하는 어휘 능력에 심각한 문제가 있었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감정을 표현하는 말을 알지 못하니 작은 감정의 일렁임에도 거친 욕설을 내뱉고, 욕설이 그 사람의 폭력적인 성향을 부추겨 결국 교도소에 쳐박히도록 이끌었다는 겁니다.


박사의 말대로라면 욕쟁이 피디가 습관처럼 내뱉는 욕설이 그의 삶을 어디로 이끌지, 보이는 듯 합니다만 좀 가혹하지 않나 싶습니다. 그러나 박사는 박사님이니깐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이고, 또 교장선생님도 그렇게 말할 수 있겠으나, 작가인 저까지 '욕하면 나쁘다'는, 누구나 다 아는 이야기를 굳이 보탤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유독 한국인들이 욕을 잘 하는 이유가 있긴 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입에서 욕을 온전히 떨궈내기에는 지독하게 험난하고 각박한 시대를 살고 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오죽하면 경제 순위 10위 안팎을 오르내리는 부자 나라의 출생률이 이 모양일까요?


그저 마시고 욕하는 것 외엔 달리 생존의 고됨을 표현할 길을 모르는 가련하고 불쌍한 우리들에게서 욕까지 뺏어간다면 너무 가혹한 처사가 아닌가 싶고, 또 욕한다고 다 교도소에 갈 팔자라면 조선 팔도에 큰집 한 번 안 다녀올 사람이 어디 있겠나 싶기도 합니다.


사정이 이러하니, 욕은 나쁘니까 하면 안 된다는 뻔한 말 대신 욕을 하나의 표현으로서, 그러나 그 효과가 매우 폭발적이기 때문에 극히 조심스럽게 다뤄야 하는 하나의 어휘로서 어떻게 사용하면 되는지, 그 방법에 대해 말씀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F*ck is a great word

좋아하는 영화 중에 데몰리션이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사고로 아내를 잃은 한 남자가 자신의 감정을 이해하지 못하고 엉뚱한 일들을 벌이다가 마지막에 자신과 화해하게 되는 내용입니다.


이 영화에서 남자는 새로 알게 된 여자의 집을 갔다가 혼자 씨리얼을 먹고 있는 여자의 아들을 보게 됩니다. 아이는 심각하게 사춘기를 지나는 중이었고 그런 탓에 남자 앞에서 엄마에 대한 못된 말들을 늘어놓습니다. 아이의 말을 다 듣고 남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너는 씨발(fuck)이란 말을 굉장히 많이 쓰는구나.
근데요?
잘못 사용하는 거야.
뭔 소리예요?
말 그대로야. 씨발은 위대한 단어야. 너무 많이 사용하면 그 가치가 희석되지. 그럼 넌 멍청해보이게 되고.
씨발!
그치? 난 아무렇지 않은데, 넌 멍청해 보이잖아. 그럼, 좋은 하루 보내렴.
뭐 저런..?!

(0:20부터 나오는 내용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TVMIr44InZc



표현으로서 욕에 대한 가장 명확한 설명이라고 생각합니다. 욕은 한편으로는 멋진 단어입니다. 잘만 사용하면 자신을 쿨해 보이게도 만들고 아니면 무섭게 보이게도 합니다. 문제는 잘 사용하기가 극히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대부분은 말하는 사람을 무식하고 멍청해보이게 만듭니다. 그 피디처럼 말입니다. (그쵸? 제가 이 글에서 벌써 몇 번이나 멍청하다고 욕을 하고 있습니까?)


제가 생각하기에 우리나라에서 표현으로서 씨발을 가장 잘 사용하는 사람은 바로 황정은 작가입니다.


앨리시어의 어머니는 씨발을 그냥 말하지 않는다. 그녀가 그년을 씨발년이라고 말할 때 그년은 진정 씨발이 된다. 백 퍼센트로 농축된 씨발, 백만년의 원한을 담은 씨발, 백만년 천만년은 씨발 상태로 썩을 것 같은 씨발, 그 정도로 씨발이라서 앨리시어는 그녀가 씨발, 하고 말할 때마다 고추가 간질간질하게 썩는 듯하고 손발이 무기력해진다.

<야만적인 앨리스씨>, 황정은



책을 안 읽는 사람들은 소설은 샌님들이나 읽는 거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으나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어떤 소설들은 영화나 그림보다 훨씬 강력하고 충격적인 방식으로 세계를 그려냅니다. 황정은의 <야만적인 앨리스씨>가 그렇습니다. 여기에는 마음을 칼로 석석 베는 듯한, 아주 날카롭고 슬픈 세계가 담겨 있습니다. 그리고 세상 모든 소설과 영화를 포함해 가장 씨발을 잘 사용한 글이기도 합니다.


이 책에는 대략 153개의 씨발이 들어있는데(제가 센 것은 아니라 문학평론가 이동진씨가 셌습니다. 이상한 사람입니다), 전부 이 지독한 세계를 묘사하기 위한 목적으로 아주 정확하게 사용되고 있습니다. 프로페셔널 작가 중에서도 황정은 외에는 그 누구도 씨발을 이렇게 정확하게 사용하는 것을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니 프로페셔널한 작가도 아닌 우리가
이렇게 날카롭고 독한 단어를
일상에서 툭툭 내뱉어서
괜히 스스로를 멍청하고 천박하게 보이게
만들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우리는 그런 사람들이 아니니깐 말입니다.


요즘 이 책을 침대맡에 두고 그래 이맛이야, 하면서 씨발의 독한 맛을 즐기는 중입니다. 저는 이 책이 정말 좋습니다.







***

지난 이야기가 궁금하시면 ▼▼▼

https://blog.naver.com/nopanopanopa/2229839797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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