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년 차 이혼녀는 어떻게 명절을 보내는가

[일상쓰기] 명절 되찾기

by NOPA


안녕하세요, 노파입니다.


결혼을 하고 가장 낯설었던 순간이 명절이었던 것처럼 이혼 후 가장 낯설었던, 그러나 동시에 놀라웠던 순간도 명절이었습니다.


결혼했을 때 명절

그간에는,

명절을 앞두고 양쪽 집에 드릴 선물을 고민하느라, 명절 전날에는 우리 엄마도 혼자 음식 준비하느라 힘든데 왜 나는 남편의 집에서 일을 하는 건지 의문을 품느라, 명절 당일에는 아침부터 남편 조상들을 위해 차례상을 차리고 치운 후에도 왜 친정에 가는 것을 눈치를 봐야하는 건지 분노를 느끼느라, 이 모든 전근대성과 가부장제의 비합리성을 타파해야 한다고 투지를 다지며 9년 간 분주한 명절을 보낸 탓에, 갑자기 눈앞에 펼쳐진 적적하고 평온한 3박4일에 화들짝 놀라고 말았습니다.


아.. 명절이라는 것은 원래
이토록 좋은 것이었지!



어렸을 때 명절

어렸을 때는 손꼽아 명절을 기다렸던 기억이 납니다. 고소한 전 냄새에 느지막이 잠이 깨어 부엌에 나가보면 바닥에 신문지가 깔려 있고 그 한가운데 놓인 부르스타 위에서 명태전이 지글거리고 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침을 꼴깍 삼키며 바라보면 엄마가 제일 예쁘게 구워진 놈을 손으로 집어줬고 저는 낼름 입으로 받아먹었습니다. 그러다 도와준다는 명분으로 본격적으로 자리를 잡고 앉아 구운 것보다 더 많은 갯수의 전을 집어먹었고는 이내 허리가 아프다며 슬금슬금 거실 티비 앞까지 굴러가도 누구 하나 뭐라고 하지 않는 시절이었습니다.


명절이란 원래 느긋하게 음식을 만들어 많이 먹고 많이 자는 날이었는데, 저는 그 좋은 명절을 지난 9년간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겁니다.


딸의 이혼 후 엄마의 명절

딸의 이혼은 부모님의 명절 모습도 바꿔놓았습니다. 우리 집에 단 한 명 있던 사위라는 존재가 사라지자마자 부모님은 당장 친척 어른들과 시골집으로 놀러가 버리셨습니다.


이혼 후 첫 명절에는 그래도 구색을 갖춘답시고 가족들이 함께 식사를 했던 것 같은데, 그 다음 해부터 부모님은 제 눈치 따위 볼 것 없다는 사실을 깨달으시고는 빨간날을 꽉 채워 친척 어른들과 함께 놀러다니십니다. 애들만 애들끼리 노는 것을 좋아하는 게 아니라 어른들도 어른끼리 노는 것을 좋아합니다.


실은 외할머니가 시골 요양병원에 계셔서 일이 바쁜 부모님이 할머니를 뵐 수 있는 시간이 명절뿐입니다. 그래서 시골로 내려간 김에 겸사겸사 친척 어른들과 회포도 풀고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오시는 겁니다.


애들 결혼시켰다고 끝이 아닙니다

하지만 제가 결혼을 했을 땐 부모님도 친정 부모, 처가 어른의 역할을 하시느라 명절에 꼼짝없이 집에서 음식을 만들어야 했습니다.


결혼한지 5년 쯤 됐을 때 엄마가, 이번 명절은 시골에 내려가도 되냐고 조심스럽게 제게 허락을 구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왜 나는 고아도 아닌데 명절에
엄마아빠를 못 봐?
엄마만 엄마가 보고 싶은 게 아니라
나도 명절에 친정 엄마가 보고 싶어!


결혼하면 시가에만 밉살스런 며느리가 되는 것이 아니라 친정에도 못된 딸년이 되는 것 같습니다. 딱히 반박할 말을 찾지 못한 엄마는 그후로도 4년을 더 명절에 외할머니도 뵙지 못하고 친척들과 마음껏 놀지도 못했습니다.


하지만 결혼이란 것이 원래 연대 책임입니다. 애들뿐만 아니라 어른들도 형식과 구색의 틀 안에 자신의 몸과 정신을 끼워 맞춰 모두가 함께 '결혼의 즐거움'을 당해야 합니다. 혼자만 그 연대의 즐거움에서 빠져나간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저의 이혼으로 비로소 저희 가족은 '연대 즐거움'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고 이후 우리는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각자의 장소에서 원하는 방식으로 놉니다. 부모님은 친척 어른들과 놀고 언니는 인터넷을 하며 놀고 저는 책을 보며 놉니다. 우리는 명절이 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립니다.


이혼 후 나의 명절

대체로 저는 명절에 해산물 요리를 해먹습니다. 오늘 아침에는 텃밭에서 딴 야채와 삶아 놓은 문어로 문어 소면과 문어 바질페스토 샐러드를 해먹었고,



아직 끝이 아니라며, 베란다로 나가 어제 구워놓은 브라우니로 모닝 디저트도 먹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이렇게 글을 한 편 썼으니 이제 밖으로 나가 한 바퀴 산책을 돌고 올 예정입니다. 돌아온 후에는 정보라 작가의 단편 소설을 읽으며 오후를 보낼 생각입니다.


어제는 해가 좋아 리클라이너에서 일광욕을 하며 책을 읽었는데 오늘은 종일 흐리다고 하니, 히터를 틀고 담요를 뒤집어 쓰고 읽어야겠습니다.

맑든 흐리든, 명절에는 뭐든 좋습니다. 참으로 느리고 충만한 일상입니다. 매일 오늘만 같으면 좋겠습니다.







아아..
전 부치느라, 운전하느라 힘들어 죽겠는데
지금 염장지르는 거냐고 비난하는 소리가
귀에 들리는 듯 합니다.

그러나 너무 얄미워하실 것 없습니다.

저는 선물같은 명절을 보내는 대신
나머지 일상의 대부분은
폐부를 찌르는 듯한 날카로운 외로움을
느끼며 살고 있으니 말입니다.

모든 면에서 좋은 삶이란 없는 듯합니다.

부디 다정하고 따뜻한 설 명절
보내시기를 바랍니다 :)


***


지난 이야기가 궁금하시면 ▼▼▼

https://blog.naver.com/nopanopanopa/2229903598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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