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쓰기] 미식가되는 방법을 알려드립니다.
확신하게 되는
안녕하세요, 노파입니다.
지난번 심하게 급체를 한 이후 한동안 멀건 흰죽만 먹어야 했습니다.
처음 흰죽을 먹을 때는, 하루 반나절 굶은 후에 들어가는 첫 끼니이기 때문에 밥물이 끓는 냄새에도 그렇게 회가 동할 수가 없었습니다. 밥냄새가 원래 이렇게 맛있게 났던가? 하면서 조심스럽게, 한 숟갈, 한 숟갈 음미하며 먹었습니다.
그러나 이 감동스러운 식사로 한 이틀 먹었더니 가만히 서있기만 해도 머리가 핑그르르 돌았습니다. 체중을 달아보니 2kg가 빠졌습니다.
멸치 인간에게 2kg란..
2kg, 어떤 사람들에게는 한끼 먹고 안 먹고에 따라 빠졌다 붙었다 할 수 있는 보잘 것 없는 무게지만, 저 같은 멸치형 인간에게는 섣불리 내어줘선 안 되는 치명적인 무게입니다. 그랬다간 바로 머리가 핑그르 돌고 땅이 일렁이며 올라오는 환상을 맛보게 되기 때문입니다.
고기가 시급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아직 속이 회복되지 않았으니 작게, 계란찜부터 시작하기로 했습니다. 힘이 없어서 계란 두 개를 대충 휘휘 저어서, 소금은 아주 조금만 넣어서, 전자렌지에 대충 돌렸더니 모양은 형편없습니다.
그러나 한 숟가락 푹 떠서 입에 넣는 순간, 그래, 이 맛이야, 라는 생각이 번뜩 들었습니다. 일주일간 제대로 먹지 못한 후에 처음 맛 본 계란의 맛은 어찌나 담백하고 고소하던지요. 마치 제가 지금껏 먹은 계란은 전부 가짜처럼 느껴졌습니다. 계란은 정말이지, 맛까지 갖춘 완벽한 식재료입니다.
계란찜을 먹어도 속에 별로 무리가 가지 않음을 확인한 저는 저녁엔 좀 더 과감하게, 기름을 두르고 고추도 썰어넣어 계란 부침을 해먹었습니다.
계란 부침을 한입 입안에 넣는 순간 저는 춘향이 아버지마냥 눈이 번쩍 뜨였습니다. 계란 본연의 고소한 맛에 올리브 기름의 향이 어우러지며 훨씬 풍미가 진해졌고, 중간중간 고추의 매콤한 맛이 적절하게 미각을 자극하며 단백한 맛의 지루함을 잡아주었습니다. 입안에서 화려한 맛의 향연이 펼쳐졌습니다.
그렇습니다. 배탈로 장을 싹 비운 후 이틀간 흰죽으로만 채워 놓은 장은, 미식의 세계에서는 마치 흰 도화지나 다를바 없어 식재료의 모든 맛과 향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덕분에 저는 이토록 소박한 식사에서도 풍성한 맛과 향을 느끼며 최고의 미식을 즐길 수 있었습니다.
맛을 찾아서
급체의 고통 이후 삶의 새로운 즐거움을 획득하게 된 저는 조금씩 과감하게 맛의 세계 탐닉하기로 했습니다.
먼저 텃밭에서 대파와 고추를 따고 수퍼에서 무를 하나 사온 후 오징어 뭇국을 끓여보았습니다.
아아, 오징어뭇국이 원래 이렇게 맛있는 음식이었던가요? 이야, 무! 이야, 오징어! 하면서 허겁지겁 한 그릇을 비웠습니다. 그러자 문득 오징어와 무 따위가 이렇게 맛있으면 브라우니는 얼마나 맛이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직 속이 충분히 회복되지 않은 상태였지만, 이미 식탐에 눈이 어두워진 저는 일단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보통 거는 손목 대신, 장을 걸고 한입 맛을 보았습니다.
빌 게이츠가 뭘 사 먹어도 결코 이런 맛은 느낄 수 없을 거라고 확신하게 되는 그런 맛이었습니다. 호두와 아몬드가 씹히는 쫀득한 브라우니와 갓 내린 커피의 조화는 탈이 나기 전에도 무척 좋아하는 음식이었으나, 단 한 번도 이렇게까지 맛을 음미하면서 먹은 적은 없습니다. 순식 간에 두 접시를 비웠습니다.
다행히 장은 잘 버텨주었으나 체중이 회복되는 속도는 여전히 느렸습니다.
무엇을 먹을까 고민하던 차에 친구에게서 연락이 왔습니다.
맛의 정점을 찍다
친구는 양꼬치를 먹으러 가자고 했습니다. 고작 브라우니와 커피를 마시면서도 빌게이츠를 깔 수 있는 제게 양꼬치는 너무나도 급진적인 맛의 도약이었습니다. 거기다 친구가 쏘는 공짜 양꼬치였습니다. 공짜로 먹으면 양잿물도 맛있다는데, 양꼬치를 공짜로 먹으면 대체 얼마나 맛있을지요..
저는 울면서(마음속으로) 양꼬치를 먹었고, 가지 무침을 먹었고(정말 좋아하는 요리입니다), 숙주나물 무침을 먹었고, 무알콜 맥주를 먹었습니다. 마치 양꼬치를 처음 먹어보는 사람처럼, 이렇게 맛있는 건 처음 먹어본다는 것처럼 온갖 맛의 향연 속에 정신없이 취하고 말습니다. 사람이 천국에 가기 위해 꼭 죽을 필요는 없다는 것을 깨달은 시간이었습니다.
한편으론 이렇게 빨리 진미를 접한 것이 못내 아쉽기도 했습니다. 이제 오징어와 무, 흰죽 따위에서 미식의 즐거움을 누릴 수 있는 시간은 끝나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저는 보통의 범인(凡人)들처럼 맛있는 것을 먹어야 맛있다고 느끼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제 빌 게이츠를 이길 수 없게 된 것입니다.
범상한 식탐 왕의 아침
오늘 아침에는 치즈와 버터를 올려 구운 72겹 데니쉬 식빵과 모짜렐라 치즈를 가득 넣은 야채 그라탕에 에티오피아산 원두 커피를 곁들여 먹었습니다. 참으로 평범하고 탐욕스러운 아침입니다. 이제는 이렇게 먹어야 맛있다고 말할 수 있게 된 범상한 식탐 왕이 되어버린 탓입니다. 남은 오징어뭇국은 쳐다보기도 싫습니다. 이제 소박한 미식의 시대는 끝인가봅니다. 나의 소박한 맛의 시절, 안녕, 안녕, 안녕!
아참,
가장 저렴하게 미식을 즐길 수 있는 방법은 속을 조져서 장을 비운 다음 이삼일 흰죽만 먹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을 먹어도 너무 맛있어서 감동의 눈물을 흘리시게 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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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이야기가 궁금하시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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