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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OPA Mar 17. 2023

'독(毒)을 차고' 삽니다

[노파의 글쓰기] 일상쓰기



안녕하세요, 노파입니다.


요즘처럼 마음에 격랑이 가득한 적이 없습니다. 원래도 일은 계획하던 대로 안 됐고 그 덕에 미래는 늘 불안했는데, 요즘 특별히 더 불안하고 화가나는 걸 보면 봄을 타는 모양입니다. 부디 저도 다른 사람들처럼 들뜨고 설레는 방식으로 봄을 타면 좋겠는데 말입니다.


본디 저는 정서가 안정적인 편이 아닙니다. 그래서 글쓰기를 합니다. 여러 방법 중에서 글쓰기가 정서 안정에 가장 효과가 좋았습니다. 다 임상으로 확인된 결과를 가지고 글쓰기를 권하는 것이니 믿고 쓰셔도 됩니다.



아무튼 저는 어제도 마음 가득 불만과 분노와 불안을 안고 빠르게 건널목을 건너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맞은 편에서는 60대 초반의, 단단해보이는 남자가 마주 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남자가 제게서 한 걸음 정도 떨어진 곳까지 가까이 오자 저를 보며 대뜸 'ssibalyeon이,' 하면서 뭐라뭐라 상소리를 뱉으며 지나가는 것입니다.


대체 제 얼굴에는 뭐가 있는 것인지, 해마다 저런 상놈들의 공격을 받습니다. 쳇, 제 얼굴에 있긴 뭐가 있겠습니까, 자신보다 작고 말랐으니 안심하고 괴롭히는 것이지요. 그들의 그런 비열함 때문에 당할수록 더욱 기분이 나빠집니다.


그런데 저는 어제 한창 봄을 타던 중이었습니다. 그런저런 마음들이 겹쳐서인지 그 말을 듣자마자 마치 버튼이 눌린 것처럼 'ssibaloma, 너나 잘해'하면서 뭐라뭐라 더 센 상소리로 받아쳤습니다. 굳이 이곳에 그 말을 다 옮길 필요는 없습니다만, 분명 더 독한 말들이었습니다. 


동시에 제 머릿속에서는 남자의 주둥이에 샷건 총구를 쑤셔넣고 '사람을 그렇게 모욕해도 됩니까?'하면서 방아쇠를 당기는 장면이, 뒤이어 남자의 뒤통수에서 허연 뇌수가 산산이 흩어지는 장면이 재생되고 있었습니다.


저는 대학교때 사격 동아리에 있었기 때문에 몇 가지 총들을 다룰 줄 압니다. 가장 많이 쏜 것은 공기총이고 가장 잘 쏘는 것은 산탄총입니다. 산탄총은 총신이 길어 가늠쇠가 거의 보이지 않기 때문에 직관을 이용해 쏘는데, 그래서 잘 맞힙니다. 직관적인 것은 뭐든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의 잔인한 상상속에서도 언제나 가장 애호하는 샷건이 등장합니다.


아무튼 그런 심한 말을 들었음에도 남자는 저를 쫒아오기는 커녕 빠른 걸음으로 갈 길을 갔고, 오히려 제가 남자를 돌아보며 잔인한 말들을 계속 읖조렸습니다. 원래 저런 사람들은 막상 반격을 당하면 빠르게 자리를 떠서 상황을 피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아무리 작아도 눈 뒤집힌 여자와 싸워서 좋을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이런 비겁한 성정은 제게도 고마운 일입니다. 맞붙어봐야 제게도 이로울 것은 없습니다. 아마도 저는 한 대 맞으면 뭔가를 꺼내 마구잡이로 휘두를 것이고, 그 탓에 특수상해죄로 더 크게 처벌받을 것입니다. 이러니 싸움은 피하는 것이 상책이라고 하는 겁니다. 비열한 데서 그치지 않고 비겁하기까지 해줘서 정말 고맙습니다.



...



십여 년쯤 전, 아들의 결혼을 앞두고, 무언가 불길함을 느끼셨는지, 저의 전(前)시어머니께서는 용한 무당에게 아드님과 저와의 궁합을 물어봤다고 합니다.


그때 무당이 말하길, 며느리가 될 애한테는 독(毒)이 있어서 평생 그 독을 녹이며 살아야 해, 라고 했답니다.


그때 저는, 어 맞어, 나 쇠독 있어, 하면서 웃어 넘겼는데, 지금까지도 종종 그 얘기가 떠오릅니다. 어제처럼 못된 말을 하거나 잔인한 생각을 할 때면 아, 내가 또 독을 쓰고 말았군, 하는 식입니다. 독을 차고 사는 사람이라니... 사실 저는 무당의 그 독 얘기가 내심 마음에 듭니다. 살면서 누구도 해치지 않도록 모쪼록 독을 잘 녹이며 살아야겠습니다.



독(毒)을 차고

―김영랑(1903∼1950)


내 가슴에 독을 찬 지 오래로다

아직 아무도 해한 일이 없는 새로 뽑은 독

벗은 그 무서운 독 그만 훑어 버리라 한다

나는 그 독이 선뜻 벗도 해할지 모른다고 위협하고


독 안 차고 살아도 머지않아 너 나 마주 가 버리면

억만 세대가 그 뒤로 잠자코 흘러가고

나중에 땅덩이 모지라져 모래알이 될 것임을

‘허무한듸!’ 독은 차서 무얼 하느냐고?


아! 내 세상에 태어났음을 원망 않고 보낸

어느 하루가 있었던가 ‘허무한듸!’ 허나


앞뒤로 덤비는 이리 승냥이 바야흐로 내 마음을 노리매

내 산 채 짐승의 밥이 되어 찢기우고 할퀴우라 내맡긴 신세임을


나는 독을 차고 선선히 가리라

막음날 내 외로운 혼 건지기 위하여



***

지난 이야기가 궁금하시면 ▼▼▼

https://blog.naver.com/nopanopanopa/2230439018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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