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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OPA May 19. 2023

[노파의 글쓰기] 돌싱의 소개팅



안녕하세요, 노파입니다.


드디어 제게도 돌싱 소개팅이 들어왔습니다. 마침내!


우리나라 이혼율이 그렇게 높다고 해도 돌싱은 생각보다 만나기 쉬운 사람들이 아닙니다. 저도 남의 집 귀한 총각을 욕심낼만큼 염치가 없는 사람은 아니어서 기왕이면 돌싱을 구인하였으나, 지금껏 누구도 제게 돌싱을 소개시켜주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참 이상한 일입니다. 다들 자기 주변에 한 명씩은 있다는, 그 흔해 빠진 돌싱에 대해 잘도 재잘거리다가도, 막상 제가 '그럼 한 번 소개 시켜줘 봐' 하면 갑자기 그 돌싱이 너무나도 아까워지는지, 제게서 그들을 꽁꽁 숨겨 놓았습니다. 그래서 제게 돌싱은 통계청의 숫자로만 존재하는, 해태나 기린 같은 환상의 생명체였습니다.


그런데 어제 친구가, '호옥시..' 하며 극도로 조심스럽게 운을 떼길래 저는 단박에 알아차리고 말습니다. '혹시 뭐? 소개팅? 돌싱?'이라며 저는 거의 치와와 수준으로 설레발을 치며 답변을 보냈습니다. 참으로 점잖지 못한 인간입니다.


그러든말든 친구는 끝까지 예의를 지키며 그 분에 대해 몇 가지 정보를 주었습니다.


              어디어디 다니고 팀장이다.            

              잘 번다. 종부세도 낸다.            

              아이에 대한 미련은 없다            

              키가 180이 넘는다.            


네 문장으로 본 그 분은 굉장히 열심히 산 사람의 표본이었습니다. 누군가에게는 엄청나게 훌륭한 조건의 사람일 것입니다. 그러나 제 취향의 훌륭한 분은 아니었습니다. 사실 저는 돈을 잘 버는 남자에 대한 남다른 선입관이 있습니다. 옹졸한 인간이라면 누구나 지니고 있다는, 열등감때문입니다.


열등감이 있으면 잘나면 잘난대로, 못나면 못난대로 곤란합니다. 잘나면 돈 좀 번다고 유세 떨 것 같아 곤란한고, 못나면 생계가 곤란합니다. 하지만 세상에는 잘나고 유세 안 떠는 사람 없고, 못나고 생계가 안 어려운 사람 없습니다. 그래서 그냥 혼자 사는 겁니다.


한 차례 열등감이 지나가자 이번엔 당연한 의문이 떠오릅니다. 키도 크고 돈도 잘 벌고 아이도 바라지 않을 정도로 쿨한 사람의 신상이, 왜 나 같은 정서 장애 걸뱅이에게까지 왔을까? 세상은 합리적입니다. 이런 불균형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기 마련입니다. 이 경우에는 연세였습니다.


이 훌륭하신 분은 저보다 무려 열 살이 많았습니다. 이십대에 열살 많은 것과 서른 아홉에 열살 많은 것은 질감이 다릅니다. 비록 저도 내일 모레 마흔이지만, 이분은 내일 모레 쉰이라고 하니, 이빨은 괜찮으신가? 하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듭니다.


물론 농담입니다. 사실 저는 정신세계가 맞으면, 나이는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건 제가 그 사람을 오래 보아 알 때의 이야기입니다.


같이 학교를 다니거나 일을 하면서 그 사람이 웃을 땐 어떤 모습이고, 화가 날 땐 어떤 얼굴이 되는지, 어떤 책을 읽고 어떤 영화를 보고 어떤 엉뚱한 생각을 하는지, 그래서 그냥 나 같은 멍충이구나, 하는 다정한 결론에 다다를 만큼 시간이 촘촘히 쌓인 후에야, 그제서야 나이는 문제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얼굴도 본 적 없는 사람의 나이는 거대한 산처럼 다가옵니다.


그래도, 나이 때문에 거절했다가, 정말 아름다운 내면을 가진 사람을 놓치게 되면, 억울해서 어쩌지? 하는생각이 퍼뜩 스칩니다. 세상에는 아름다운 중년들이 많습니다. 어쩌면 이분도 책 읽는 것을 좋아하고, 요르고스 란티모스의 신작을 기다리면서 함께 텃밭을 일구는 것을 좋아할지도 모를 일입니다.


혹은 운동을 좋아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어깨도 넓고 머리털이 숫사자처럼 많을 수도 있습니다. 만일 그렇다면, 돈을 좀 번다고 괄시를 해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어깨넓고 머리털 많고 책도 읽는다는데, 자존심이 다 뭐랍니까? 그래서 저는 일단 사진을 보내달라고 했던 것입니다.


잠시 후 사진이 왔고, 저는 손가락에 경련이라도 인 것처럼 노노노노노라고 황급히 쳐서 답문을 보냈습니다. 정말이지 점잖지 못한 인간입니다.


오해하실까봐 말씀드리면, 그분의 외모에는 전혀 문제가 없습니다. 훌륭합니다. 다만, 제게 훌륭한 얼굴이 아니었을 뿐입니다. 이토록 노골적으로 노화가 진행되는 얼굴을 품기에는 제 그릇이 너무 작습니다. 어쩌면 저는 형편없는 외모지상주의자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부디 선생님의 외모에 아무런 편견이 없을, 열 살쯤 연상의 여성분을 만나 사랑받으며 사시면 좋겠습니다. 어르신의 앞날에 무궁한 발전이 있기를 기원드립니다.


농담처럼 이야기를 늘어놓았지만, 사실 중년에게 소개팅은 꽤 잔인한 일입니다. 20대를 지나면 얼굴에는 주름이 지고, 기미가 끼고, 중력때문에 눈살이며 볼살이며 밑으로 줄줄 흐르는 데다가 머리숱까지 성글어지기 때문에 입체감 없는 사진으로 보면 더욱 못생겨 보입니다. 아마 제 사진을 보냈다면, 그쪽에서도 발작적으로 노노노노노를 눌렀을 것입니다.


고백하자면, 저는 눈이 그렇게 높지 않습니다. 그저 함께 조용히 차를 마시며 담소를 나누고, 책을 보고, 영화를 보고, 산책을 다니고, 함께 밭을 갈 수 있는, 그러면서 고양이를 좋아하며, 고기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 그런 스님같은 남자를 원합니다.


그 스님 같은 남자는, 주변 정리가 잘 되고 자신의 입 하나는 건사할 줄 아는 동시에 마음도 단단해서, 어느날 불안에 휩싸인 제가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소리를 지르거나 아니면 갑자기 분노로 시발거리며 돌아다녀도 놀라지 않을, 강인한 마음을 지니고 있어야 합니다. 이제보니 제가 원하는 것은 스님이 아니라 부처님 같은 남자인 듯 합니다.


그런데 제 머릿속 부처님은 이렇게 생겼습니다.


<리틀 붓다>, 키아누리브스


그렇습니다. 혼자 사는 사람은 다 이유가 있는 법입니다. 이제야 친구들이 왜 제게서 자신의 돌싱을 그렇게 꽁꽁 숨겨놨는지 알 것 같습니다.


그래도 혹시 주변에 이런 돌싱이 있다면, 그런 사람이 왜 돌싱이 됐는지는 모르겠으나 아무튼 있다면, 너무 아까워하지 마시고, 조용히 연락처를 남겨주시기 바랍니다. 나머지는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

지난 이야기가 궁금하시면 ▼▼▼

https://blog.naver.com/nopanopanopa/223101525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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