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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OPA May 26. 2023

같이 삽니다만, 더는 묻지 마십시오

[노파의 글쓰기] 어른들의 사랑


안녕하세요, 노파입니다.

엊그제 마지막 강의가 끝났고 다음주에 강의료가 들어온다기에 냅다 사고 싶었던 것을 질렀습니다.


짜잔!

현관방충망입니다...


화장도 할만큼 했고, 옷도 살만큼 샀다고 생각이 되니 갖고 싶은 것들이 늘, 방충망, 화장실 거울장, 커피 쿠폰.. 따위의 것들입니다. 아! 고양이와 앵무새도 갖고 싶습니다. 그건 10년 쯤 후에. 좀 더 시골로 들어가서.


같이 삽니다만 부부는 아닙니다

여하튼 오늘 아침부터 동네 인테리어 가게 남자 사장님이 오셨고, 저는 내친 김에 화장실을 보여드리며 거울장을 바꾸는데 비용이 얼마나 들지 여쭤봤습니다. 사장님은 어물어물 하시더니, 가게에 전화해서 여자 사장님께 물어보면 알거라고 했습니다.


저는 생각없이, '아, 견적은 사모님 담당이신가봐요' 했는데, 사장님 표정이 어째 애매하게 일그러지더니 입가에 미세하게 경련이 일었습니다. 정말 그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정확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죽어도 대수롭게 넘기지 못하는 사람들. 제가 무척 좋아하는 류의 인간들입니다.


저는 혹시 말실수를 한 건가 싶어, '두 분이 부부 맞으시죠?' 하고 확인 질문은 던졌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니 참 무례한 질문입니다. 저는 왜 이렇게 빨리 꼰대가 되어가는 걸까요?


사장님은 잠시 생각하시더니 결심한 듯 입을 열었습니다. '같이 살기는 합니다.' 저는 그 말에 속수무책으로 빵 터지고 말았습니다. 그러고는 '아, 사정이 있으시구나'하며 황급히 매듭을 지었습니다.


그제야 사장님도 긴장이 풀렸는지, '예, 같이 살고는 있는데, 더는 묻지 말아주십시오. 뭐가 많습니다' 라고 말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프로답게 각자의 일을 하고 돈을 주고받고 세이 굿바이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저는 지금까지, 그 사정이 무엇인지 궁금해 죽어가는 중입니다.


대체 무슨 사정이 있기에 같이 사는데도 부부라는 단어에 저렇게 질겁을 하는 것일까요? 아마도 그 사장님은 어떻게 하면 작가를 고통스럽게 할 수 있는지, 잘 알고 계시는 것 같습니다. 그것은 속사정의 냄새만 풍기고 자리를 뜨는 것입니다.


어른들의 사랑

어른들의 사랑은 참 재밌습니다. 그토록 증오하면서도 끝내 붙어있습니다. 사실 결혼, 불륜, 이혼, 등의 딱 떨어지는 정의는 대학 나와서 취직하고 식을 올리는, 일종의 공인된 삶 속에서 반듯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깐, 범생이들의 이야기입니다.


그 틀에서 조금만 벗어나도, 이게 결혼인지 불륜인지, 헤어졌다는 건지 같이 산다는 건지, 정의되지 않는 삶을 사는 사람들이 수두룩합니다. 저희 일가의 어떤 어른도 누구와 사는 건지 만나는 건지, 암튼 그러고 있는데, 그 누구는 아내와 아이들이 있고, 그래서 우리 일가의 어른이 그 아내와 아이들에게 음식과 돈을 보내주고, 그러면 그들은 맛있게 먹고 쓰고. 또 친척 누구는 알고보니 그 부모 사이에서 난 아이가 아니라 어디서 데려온 아이고..


우리 일가에서 벌어지는 일이라고 하니 이것은 내 문화권인데도 범생이인 저는 엄청난 문화 충격을 받습니다. 그러나 다른 어른들은, 사람이 살다보면 그럴 수도 있지, 하며 쿨하기가 이루 말할 수가 없습니다. 뭐 이렇게 리버럴한 사람들이 다 있나, 이들이 언제부터 이렇게 대인배였나, 해서 보면 또 자기 결혼에 있어서만큼은 지독하게 보수적입니다.


저희 어머니도 제가 이혼할 때 거의 공황장애가 올 정도로 충격을 받아 극구 말리셨습니다. 음.. 어머니, 당신의 형제 자매 중 누구는 이렇게 살고 있고, 그간 어머니는 그런 삶의 형태에 아무 저항감도 보이지 않으셨습니다만..?


그래서 저는 부모님이 해준 밥을 먹고 대학까지 나온 저같은 사람들의 사랑 이야기에 별 흥미가 없는 것입니다. 어른들의 사랑에 비하면, 죄송합니다만 그것은 너무나 애송이의 사랑입니다. 중년의 남녀가 오래도록 같이 살고는 있지만 우리를 부부라고 정의내리지 마라, 왜인지도 묻지 마라, 이 정도는 돼야 이렇게 글을 쓰고 싶어지는 것입니다.


살의

사실 얼마 전에 산책을 하는데 어떤 중년의 남성이 자전거를 타고 실실 웃으며 쫓아온 일이 있었습니다. 체구가 작은 여성으로 살면, 이런 일은 교복을 입는 순간부터 겪게 됩니다. 그 두렵고, 불쾌하고, 약자로서 짓밟힌 기억들이 쌓이고 쌓여 39세에 이르게 되면, 저 자가 내 모든 불안의 근원이다, 내 오늘은 기필코 저자를 제거하여 이 오랜 불안으로부터 해방되고 말리라, 하는 강렬한 살의에 휩싸이게 됩니다.


그날 우리는 산책로에 서서 4분 가량 서로를 노려보았고, 제가 내리칠만한 돌을 물색하는 사이 그가 먼저 자리를 뜬 덕에 살육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런 분노는 쉽게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제 불교계 법사님께 그토록 집요하게 살인의 과보에 대해 물어봤던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아침에 오신 사장님은 저를 쫓아온 그 남자와 비슷한 연배였습니다. 그러나 그 분이 사람을 대하는 태도를 보면, 살면서 누구에게 나쁜 일 한 번 해본 적 없는 사람임을 금방 알 수 있었습니다. 선량하고 열심히 사시는 분을 보니 다시 사람에 대한 신뢰가 채워졌습습니다. 거기다 어른의 사랑을 하고 있다는 솔직한 답변에 빵 터지면서, 저는 일주일동안 사로잡혀 있었던 모든 불쾌한 감정에서 한순간에 헤어나올 수 있었습니다.


역시 사람을 해방시키는 것은 살인이 아니라 웃음입니다. 누가 죽도록 밉더라도 만하면 죽이지 마시고, 오늘도 그저 많이 웃는 하루 보내시기를 바랍니다.



***

지난 이야기가 궁금하시면 ▼▼▼

https://blog.naver.com/nopanopanopa/2231064727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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