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파의 글쓰기] 토함산은 토할 것 같아서 토함산이다
*밀리로드에 여행 에세이를 연재하면서 다시 각색하였습니다.
안녕하세요, 노파입니다.
30대의 마지막 해를 기념하여 떠나는 첫 번째 여행지는 바로, 경주입니다.
#1. 경기도민의 경주여행
아침 9시에 고속버스터미널에서 버스를 타려면 경기도민은 5시에 일어나야 합니다. 붙어서 떨어지지 않는 눈꺼풀을 억지로 뜯어내며 경기도민이라 참 서럽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래서 사람들이 강남, 강남 하는가 봅니다.
그러나 정작 강남 사람들은 고작 고터에 빨리 도착하기 위해 그 비싼 땅에 사는 것이 아닐 겁니다. 그리고 버스를 타고 경주에 갈 것 같지도 않습니다. 저 역시, 징징대는 것에 비해 경기도민으로 산 기간은 그리 길지 않습니다. 올해 2년 차입니다. 그 전에는 줄곧 서울에서 살았습니다. 엄살이 심한 편입니다.
경주는 토함산 때문에 갑니다. 얼마 전에 다큐멘터리를 보는데 노스님이 "우리는 숨을 쉬기 때문에 정귀한 존재"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숨을 쉬는 건 무척 중요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어쩐지 "숨을 쉬기 때문에" 자리에 무슨 말이 들어가도, 그러니깐 "우리는 밥을 먹기 때문에", "우리는 잠을 자기 때문에", "우리는 똥을 싸기 때문에" 정말 귀한 존재다, 라고 해도 말이 될 것 같지만 같은 말이라도 노스님이 하면 또 엄청난 진리처럼 들리기 때문에 경청했습니다. 그런데 마침, 숨을 내쉬고 들이쉰다는 이름의 산이 있다고 하여 경주까지 내려간 겁니다. 그 산이 바로 토함산입니다.
가는 길에 지하철에서 찾아보니 토함산이라는 이름은, 해가 산을 넘어갈 때 전경을 토해내는 것 같다는 뜻에서 유래했다고 합니다. 속았다는 기분이 들었지만 이미 길을 나서버렸고, 또 종교라는 게 원래 그럴듯한 말로 꾸며야 사람들이 전도되는 거라서 좋은 게 좋은 거라고 그냥 넘어가기로 합니다.
#2. 여행 패션
이번 여행은 산행이 목적이므로 오랜만에 등산화를 꺼내 신었습니다. 그런데 신발에 페인트 자국이 덕지덕지 묻어 있습니다. 2년 전에 이사 오면서 타일을 깨고 페인트칠을 할 때 등산화를 신고해서 그렇습니다. 이럴 때는 그냥 빈티지 신발인척 하면 됩니다. 물론 애초에 누구도 관심은 없습니다.
바지는 적당히 탄력 좋은 레깅스 바지를 입어줬습니다. 거기까지 가서 산만 탈 순 없으니 겸사겸사. 그런데 너무 지하철 바닥과 융화되는 색이라 마치 제가 지하철의 일부가 된 듯한 기분입니다. 아무래도 청바지가 아니라 ‘지하철 블루’ 바지라고 해야겠습니다. 먼 훗날 종교계에 계신 후손들이 이 사진을 보게 된다면, ‘토함산 숨 쉬는 블루’ 식으로 조금 더 그럴듯하게 말을 만들어주면 고맙겠습니다.
#3. 럭키비키 토함산
토함산에 갔다가 마지막 숨을 토해낼 뻔했습니다.
처음엔 무척 운이 좋다고 생각했습니다. 네이버 지도 앱을 열어보니 불국사에서 석굴암까지 가는 유일한 길이 차로를 두 시간 반 동안 걸어 올라가는 길이라고 나와 있었습니다. 하여 묵묵히 차로를 따라 올라가는데 핫핑크 립스틱이 매혹적인 경주 언니가 제 앞에서 차를 세우고는, 지금 제정신이냐고, 얼른 타라고 해서 석굴암까지 편하게 차로 올라왔기 때문입니다.
경주 언니가 그토록 놀란 이유는, 제가 간 길이 도보가 없는 순도 백 프로의 차로였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원체 커브가 심한 길이라 맞은편에서 이리저리 핸들을 틀며 내려오던 운전자들이 코앞에서 저를 발견하곤 다급히 브레이크를 밟는 통에 저 역시 미안하던 차였습니다.
그러나 경주 천사를 만나 팔자에도 없는 히치하이크를 경험하며 역시 난 행운의 아이콘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덕분에 무사히 석굴암과 토함산 정상을 찍을 수 있었고, 탑골길을 통해 순탄하게 하산하려고 했습니다.
왜 탑골길인가 하면, 역시 네이버 지도앱에서 그리 가라고 안내해줬기 때문입니다. 다음 목적지가 책방이었는데, 책방까지 가는 가장 빠른 길이 탑골길이라고 했습니다.
#4. 황천길로 가는 탑골길
돌이켜보면, 차라리 차로로 내려가는 편이 덜 위험했을 것 같습니다. 탑골길을 가 보니 이곳은 사람 다니는 길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먼저, 그날 기온이 영상 17도였는데도 탑골길로 들어서자마자 토함산 정상에도 없던 눈길이 펼쳐졌습니다.
무엇보다 경사가 무척 가팔랐습니다. 어느 지점에서부턴 나무뿌리를 붙잡고 벽을 기어오르고 있었는데, 그때 확신했습니다. 이건 길이 아니다. 그러나 체 게바라와 생일이 같은 사람으로서 이만한 경사에 길을 물리는 것은 무척 자존심이 상하여 꾸역꾸역 앞으로 전진했습니다.
죽은 나무 덩치를 넘고 마른 가지를 해치고, 마침내 사족보행에서 몸을 일으켜 사람답게 두 발로 서서 뒤를 돌아보니 그곳엔 정말 절벽이 있었습니다.
경주 시민이라고 이런 식으로 등산을 할 리는 없습니다. 그러나 저는 분명 길이 아닌 곳을 기어 다녔으므로 대체 왜 이걸 길이라고 알려준 것인가, 하며 지도를 확대해보니 '추락주의'라고 쓰여 있었습니다. 말하자면, 길은 맞지만 황천 길일 수도 있다,라는 거지요. 그럼 이것을 과연 길이라고 할 수 있는가, 하는 근원적인 질문을 던져보지만 답이 궁금해서 그런 건 아니니 그저 이런 중요한 정보는 확대를 안 해도 보이게 해주면 좋겠습니다. 황천길 따위 누구도 가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나마 경사가 덜 사나운 것을 위안으로 삼으며 묵묵히 산길을 내려가니, 이번엔 어느 씨족의 무덤 밭이 펼쳐졌습니다. 세 시간 남짓 산길을 헤매는 동안 산 사람의 그림자도 못 본 사람을 데드맨들의 매장지로 안내하다니…. 이 산행은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요?
저는 영혼부터 육신까지 탈탈 털린 후에야 간신히 산을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지도에는 두 시간 거리라고 돼 있었는데, 실제로는 네 시간 정도 걸린 것 같습니다. 하루종일 산만 타다 끝날 생각은 추호도 없었는데 말이지요.
이런 제 아쉬운 마음을 읽기라도 한 것인지, 오늘의 불행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천신만고 끝에 산을 벗어난 제 눈앞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절절 끓는 태양 아래 바짝 말라 비틀어진 황량한 논밭이었습니다.
그것은 마치 “마! 이게 진짜 경주다!”하는 것 같았습니다. 어디서도 본 적 없는 서슬 퍼런 황량함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저는, 이게 진짜 경주군, 하면서 그늘 한 점 없는 아스팔트 길을 30분 동안 걸었습니다. 밭 한가운데 서 있는 죽은 고목이 마치 제 자신 같았습니다.
세상 사람들아,
탑골길을 안 갔다 왔으면 어디 가서 경주를 안다는 소리는 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대들은 경주를 모릅니다.
그러나 계속 모르시기를 바랍니다.
세상 모든 걸 다 알면서 살 필요는 없습니다.
경주의 매운맛은 제가 볼 테니, 여러분은 경주의 단맛, 고소한 맛만 보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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