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파의 글쓰기] <누군가의 책방>과 아니 에르노
안녕하세요, 노파입니다.
이번엔 경주의 독립서점을 가보았습니다.
#1. 기와집 책방과 귀신
이 잘생긴 녀석은 호두입니다. 잘 생겼지만 얼굴마담은 아닙니다. 위용 넘치는 가드입니다. 혼자 장사하시는 사장님을 위해 어찌나 짖어대던지, 귀청 떨어지는 줄 알았습니다. 저이는 도둑이 아니다,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지 마라, 사장님의 오랜 설득으로 호두는 진정을 찾은 후에도 저와는 끝내 눈을 마주치지 않았습니다. 기개가 있는 갭니다.
기개 넘치는 호두가 늠름하게 지키는 이곳은 경주 외곽에 위치한 독립서점, <누군가의 책방>입니다.
여행을 갈 때마다 그 지역 책방에 들러 여행지의 분위기에 맞는 책을 한 권씩 사보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러면 나중에 책꽂이에 꽂힌 책만 봐도 그날의 감정이 새록새록 되살아나서 여행을 훨씬 더 오래, 그리고 진하게 기억할 수 있습니다. 특히 작가가 된 후로는 마치 책방을 구경하기 위해 여행을 떠나는 사람처럼 늘 그 지역의 독립서점부터 찾 다음에 그곳의 운영 시간과 위치를 중심으로 여행 일정을 짭니다.
저도 사실 오늘만큼은, 토함산 등반의 여파도 있니 다른 여행객들처럼 느릿느릿 식도락이나 즐기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으나, 제가 경주에 머문 3일 중 책방이 문을 여는 날은 딱 이날 하루뿐이었습니다. 안 가면 일정이 전부 틀어지니 울면서 가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멀리서 서점의 처마가 눈에 들어오는 순간부터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기와집 책방이라니! 정말 경주에만 있을 법한 근사한 책방입니다. 기와지붕에서 풍기는 근엄함과 아담한 마당과 낮은 울타리가 자아내는 소박함이 정답게 조화를 이루는 곳입니다.
그런데 제가 마당 안으로 발을 들여놓기도 전에 호두가 실성이라도 한 것처럼 짖어대는게, 저는 내심 반가웠습니다. 지금껏 토함산 무덤 소굴을 헤매다녔던 터라 혹시 귀신 한둘은 묻어온 게 아닐까 괜히 께름칙했기 때문입니다. 호두의 호통에 귀신이 다 떨궈지는 것 같았습니다.
사실 경주는 거대한 봉분들을 시내 한가운데서 볼 수 있는, 상당히 무덤 친화적인 도시임에도 불구하고 민간인들의 작은 봉분은 여전히 으스스하게 느껴집니다. 거기다 호두까지 저렇게 짖어대는 걸 보면, 어쩐지 이 으스스함에 실체가 있는 것도 같습니다. 저는 먼지를 터는 척하며 괜히 몸 여기저기를 툭툭 털어봅니다.
호두 : 뭐해?
나 : 어, 귀신 털어.
호두 : 나가!
#2. 아니 에르노의 ‘인생은 환갑부터!’
호두도 점차 진정하고, 저도 괜히 몸과 마음이 더 가벼워진 것 같아 그제야 편안하게 책방을 둘러봅니다. 혹시 내 책이…? 하는 마음이었으나 역시 없습니다. <누군가의 책방> 사장님은 주로 독립 출판 서적들과 고전에 관심이 많은 듯합니다.
나도 언젠가 고전이 될만한 글을 써 봐야지! 가슴에 허세를 가득 품고 집어 든 책은, 현대인의 고전이라고 할 수 있는 아니 에르노의 <사진의 용도>였습니다.
제가 여행지의 책방에서 책을 고르는 기준은 딱 두 가지입니다.
1. 얇을 것
2. 재밌을 것
일단 두께는 합격입니다. 그렇다면 아니 에르노가 쓴 사진 에세이는 어떤 것일까? 책 내용을 쓱 살펴보았더니, 그가 쓴 중 가장 야한 이야기일 거라는 예감이 강렬하게 스쳐갔습니다. 두 기준 모두에 부합하므로 고민하지 않고 책을 계산대로 가져갑니다.
카드를 받은 사장님이 포스기를 버튼을 탁, 치는 소리가 유독 산뜻하게 들렸습니다. 산뜻한 것은 포스기를 치는 사장님의 손일까요, 제 마음일까요? 마감을 30분 앞두고 책을 한 권 비워낸 사장님의 홀가분함과, 세상에서 가장 글을 잘 쓰는 작가의 “섹스 후 남겨진 흔적들”(실제 커버에 쓰인 말입니다)을 건네받은 저의 음흉함이 함께 만들어낸, 우리 모두의 산뜻함일 겁니다.
툇마루에 책을 놓으니 어쩐지 아니 에르노가 다리를 꼬고 앉아 킬 힐을 발가락 끝에 달랑달랑 걸고 있는 것만 같습니다. 실제로 아니 에르노가 이곳 툇마루에 앉아 있었어도 어느 모로 보나 저보다 훨씬 생기발랄했을 것 같습니다.
삼십 대인 저는 방구석에 녹용 팩을 집어 던지는 남자와 아침을 먹고, 죽은 자들이 촘촘히 묻힌 산길을 네발로 기어 다니느라 점심도 걸렀는데, 환갑이 넘은 에르노 언니는 애인과 가장 열정적인 순간의 흔적을 사진으로 찍어 글도 쓰고 돈도 벌기 때문입니다.
60대의 연애가 이토록 치명적인 것을 보니, 그래서 인생은 육십부터라고 하는 거구나 싶습니다. 그렇다면 에르노 언니가 천수를 누리면 좋겠습니다. 오래오래 황혼의 열정과 단맛을 즐기며 제가 곧 뒤따를 순간들의 기쁨을, 그 숨 막히는 언어로 전부 기록해주시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나이 드는 게 별로 슬프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날이 오기까지 저는, 죽었다고 생각하고 20년은 더 우여곡절을 겪어야겠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날이 오면, 저도 언니처럼 글도 잘 쓰고, 연애도 잘하고, 멋진 노파로 살고 싶습니다.
***
글이 재밌으셨다면, 아래 밀리의 서재 링크에서 '밀어주리' 버튼을 눌러주세요. 저를 열심히 쓰게 하는 버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