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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OPA Jun 30. 2024

매운맛 경주 여행3.

[노파의 글쓰기] 경주 상남자의 사랑법


* 밀리로드에 여행 에세이를 연재하면서 다시 각색한 글입니다.


#1. 경주 골목 식당의 일인자


지옥의 토함산 등반이 있기 전 아침에 벌어진 일입니다.


저는 이른 산행을 위해 새벽부터 숙소를 나와 문을 연 식당을 찾아 근처 골목을 헤맸습니다. 골목 끝에서 노포의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가게를 발견해 문을 열고 들어서니 초로의 여성 사장님이 평상에 한 무릎을 세우고 앉아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식당 한가운데 놓인 기름 난로부터 평상을 이어붙여 만든 좌식형 공간까지, 모든 것이 이 골목 일인자라고 말하는 듯한 식당 풍경이었습니다.     


저는 손석구 씨 얼굴이 큼지막하게 걸린 포스터 앞에 자리를 잡고 앉아 아침부터 돼지 찌개를 시켰습니다. 산을 오르려면 미리 고기로 속을 채워야 한다는 오랜 믿음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장님이 뚝배기에 돼지 찌개를 올리고 계란을 부치며 부지런히 식사 준비를 하는 사이 다시 가게 문이 열리며 두 번째 손님이 들어왔습니다. 작업복 차림의 60대 남성 두 분이었는데, 사장님은 반갑게 인사를 건네고는 묻지도 않고 알아서 척척 불 위에 큰 솥을 하나 걸었습니다. 단골손님인가 봅니다.      


마침 손석구 씨 얼굴이 지겨워졌던 터라 저는 자연스레 제 등 뒤에 앉은 두 손님의 대화에 집중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 많은 말을 하지 않았기에 저는 최대한 조용히 돼지를 우물거리며 대화를 놓치지 않기 위해 애를 써야 했습니다. 짧은 대화로 미루어 두 분은 함께 폐기물 수거 일을 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다 한 명이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주머니에서 녹용 팩 하나를 꺼내 다른 한 명에게 건네고는 “내 차에 이거 박스로 있어”라며 자랑을 했습니다. ‘자네 생각나서 하나 챙겨왔네’ 식의 말은 차마 낯간지러워 못하겠는가 봅니다.      


받는 사람도 어지간히 쑥스러움을 타는 듯했습니다. 으레 뒤따라야 할 고맙다, 어떻다 하는 말은 한마디도 들리지 않고, 갑작스런 침묵 속에서 빛의 속도로 식사를 흡입하는 소리만이 낭랑하게 장내에 울려 퍼졌습니다. 

그리고 녹용 팩을 준 친구가 화장실로 들어갔을 때 일이 벌어졌습니다.


#2. 경주 상남자의 녹용 팩 구애

혼자 남은 남자는 마치 이 순간을 기다렸다는 듯, 망설이지 않고 사장님이 앉아계신 평상으로 다가갔습니다. 그러더니 방금 동료에게서 받은 녹용 팩을 말없이 사장님 얼굴 앞에 내미는 것이었습니다.      


사장님은 아유~ 하고 손사래를 치며 녹용을 받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남자가 녹용 팩을 냅다 평상 구석으로 던졌습니다. 그리고는 평상 밖으로 삐죽 나온 사장님의 양말 신은 발을, 자신의 워커 신은 발로 툭, 걷어차는 것이었습니다.      


깜짝 놀란 제가 남자를 돌아보니, 그의 얼굴은 씨익, 웃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사장님도 아유~, 하면서 눈웃음을 지어줬습니다. 그러니깐 남자의 팩 던지기와 발차기는 결투 신청이 아니라 나름의 구애 행위였던 것입니다.      


사장님의 미소를 본 남자는 그제야 만족한 듯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서는 식탁 밑에 놓인 쓰레기통을 끌어내어 캬악, 하고 가래를 뱉었습니다. 그리곤 야성미 넘치게 문을 열고 나가버렸습니다. 아직 식사 중이던 저는 경주 상남자의 이 모든 구애 의식에 식욕이 떨어지고 정신이 아득해졌습니다.     


그때 화장실에서 나온 동료가 상남자가 나가버린 것을 알고 헐레벌떡 문밖을 나서려는데 사장님의 앙칼진 목소리가 그의 뒤통수에 꽂혔습니다. “계산은요?!” 상남자는 동료에게서 받은 녹용 팩으로 사장님께 구애만 하고 밥값은 치르지 않았던 겁니다. 그런 탓에 동료는 사장님께 붙들려 2인분의 밥값을 치러야 했습니다.   

  

저는 실리와 사랑을 동시에 쟁취한 경주 상남자가 대단하다는 생각이 드는 동시에 이런 상남자를 품기엔 제 그릇이 너무 작아 참으로 다행이라고 느꼈습니다. 저였다면, 그가 녹용 팩을 던지는 순간 결투 신청으로 오해하여 장판 밑에 숨겨둔 리볼버를 냅다 꺼내 들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 나이 서른아홉, 

이제 사랑을 아는 나이라고 생각했는데 저는 아직 애송이었습니다. 그러나 더 깊이 알고 싶지는 않습니다. 60대의 사랑은 너무 치명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니 에르노 작가님도 상남자의 구애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실 것 같습니다.


그저 경주 언니들이 글을 많이 써주면 좋겠습니다. 그 치명적인 세계를 글로만 배우고 싶습니다. 


***

글이 재밌으셨다면, 아래 밀리의 서재 링크에서 '밀어주리' 버튼을 눌러주세요. 저를 열심히 쓰게 하는 버튼입니다:)

https://www.millie.co.kr/v3/millieRoad/detail/15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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