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 혼자 하는 여행] 보성-율포해수욕장
9/23 보성 1일차
바다에 왔습니다. 멀리 육지의 끝에서 보는 남해 바다입니다.
이 바다를 보기 위해 집에서 6시 50분에 출발하여 16:20분에 도착습니다. 장장 9시간 30분이 걸렸습니다. 예전에 모스크바 갈 때도 이 정도는 안 걸렸던 것 같습니다.
물론 중간에 터미널에서 2분 차이로 버스를 놓쳐서 두 시간을 기다린 시간이 있긴 하나, 그걸 뺀다 해도 7시간 30분입니다. 기차로 오면 너무 많이 갈아타서 한 번만 갈아타려고 버스를 탔더니 이 사달이 났습니다.
그래도 바다를 보는 순간 내가 이걸 보려고 9시간을 넘게 달려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참 순한 바다입니다.
작년에 여수에서 본 바다는 같은 남해바다인데도 고기잡는 바다, 노동의 현장 같은 강인한 인상을 받았다면 이곳은 갈매기와 ‘그대 그 따위로 살 것인가’의 왜가리의 바다로 보입니다. 순박하고 선량해 보입니다.
갈매기와 눈싸움을 하면서 종일 바다만 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어림도 없는 생각입니다. 수건을 깔고 앉은지 30분만에 일어서서 뭐 재밌는 거 없나 하고 어슬렁대기 시작했습니다.
아무 것도 안하고 앉아 있는 것은 생각처럼 쉬운 일이 아닙니다. 소주라도 한 병 까야지 몇 시간씩 앉아 있을 수 있는 겁니다.
유사 금주인인 저는 바다 뒤편의 ‘율포해수녹차센터’로 향합니다.
이곳은 보성군에서 작정하고 만든 직영 온천센터로 규모도 굉장히 크고 시설도 깨끗합니다. 이런저런 물놀이를 즐길 수 있는 3층 노천탕이 유명한데, 제가 갔을 때는 이미 문을 닫은 후였습니다(5:30 폐장)
그러나 아쉽진 않습니다. 어차피 9시간의 여독을 빼내려면 2층 목욕탕의 뜨거운 물이면 충분했기 때문입니다.
2층만 보면 그냥 큰 규모의 목욕탕이 아닌가 싶지만 이곳에는 다른 목욕탕에서는 절대 볼 수 없는게 있습니다. 바로 통유리 바다 뷰입니다.
유리 너머로 바다를 보며 해수탕과 녹차탕에 번갈아 몸을 담가 피로를 푸는 기분은 정말 근사합니다. 39년간 지은 죄까지 씻겨내려가는 기분입니다.
*
영혼을 정화했으니 밥을 먹을 차례입니다. 미리 봐뒀던 식당으로 향합니다. 보성은 녹차와 꼬막이 유명한데(벌교가 보성에 속한 지역입니다. 알고 계셨습니까? 난 몰랐습니다), 오늘의 목표는 전어입니다.
원래 전어 백반은 2인분부터 주문해야 되는데, 손을 파리처럼 비비면서 아이고… 하고 짧게 탄식하면 웬만해선 못 쫓아냅니다. 물론 그래도 쫓겨날 때도 있으나 오늘은 성공했습니다.
엄청나게 고소한 전어회를 야채와 함께 매콤 새콤하게 무친 전어회는 말 그대로 가을 별미입니다. 전어의 기름기를 새콤한 초고추장 소스로 버무린 야채가 딱 잡아주니 맛이 조화롭기 이를 데 없습니다.
아직 장염에서 완전히 회복되지 않았지만 이 맛을 놓치고 싶지 않아 집에서 장염약도 갖고 왔으므로 천하무적입니다. 무침부터 구이까지 전부 다 먹었습니다. 뒷일은 뒤에 걱정하면 됩니다.
내일부터는 산으로 들어갈 거라서 바다가 아쉬워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한 번 더 들렀습니다.
*
바다란 뭘까요?
바다가 왔다갔다 움직이는 소리만 들어도 마음이 차분해지다가도 웅장해지고, 멍해지는 것 같다가도 다시 어떤 원기가 샘솟습니다.
주저앉고 싶으면서도 일어서고 싶다고 느껴지는 게, 꼭 제 인생같습니다. 산산조각난 것 같은데 반짝반짝 빛나는 것 같기도 하고, 엉망진창 끝나버린 것 같은데, 또 뭔가 재밌는게 시작될 것도 같습니다.
얼마 전에 청풍호를 보면서 이것도 좋지만 더 큰 걸 보고 싶다. 바다를 보고싶다,라고 생각했는데, 역시, 직접 보니 더 확연해집니다. 청풍호가 제아무리 크다고 해도 큰물이 담고 있는 이 장대함, 그 깊이에는 비할 바가 아닙니다.
*
내일은 녹차밭에 갑니다. 그 다음 날엔 산으로 갑니다. 바다가 이렇게 마음에 드니, 산도 마음에 들면 저의 시골살이를 이곳에서 해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교통이 고약하니 오는 사람도 별로 없다는 점도 마음에 듭니다. 어제까지만 해도 불안에 치를 떨면서 대체 보성엔 왜 가겠다고 해서 이 난리냐고, 다 물리고 다 엎어버리라며, 엄청난 내적갈등을 겪었는데(원래 여행을 앞두면 떠나기 극도로 싫어자는 타입입니다), 막상 오니깐 마치 이곳에 오기 위해 39년을 살아온 것 같은 기분입니다.
보성 너무 좋습니다.
***
지난 이야기가 궁금하시면
https://m.blog.naver.com/nopanopanopa/223587753556?referrerCode=1
#노파의글쓰기 #어느날글쓰기가쉬워졌다 #글쓰기 #글잘쓰는법 #노파 #김수지작가 #에세이 #문해력 #어휘력 ##책리뷰 #서평 #감성글 #보성 #보성여행 #율포해수욕장 #전어무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