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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OPA Sep 26. 2024

보성 2일차. 녹차밭의 슬픔

[여자 혼자 하는 여행] 보성-녹차밭(대한다원)

보성 여행 2일차 : 녹차밭

* 시골에서 버스 타는 법

뚜벅이로 지방 여행을 할 때는 반드시 버스의 첫차 출발 시간을 확인해야 합니다. 지도앱에서 아무리 많은 버스가 그 정류소를 지나간다고 나와도, 이들 대부분은 하루에 한 번만 운행하는, 배차시간 24시간의 악마들이기 때문입니다.


버스 첫차 출발 시간과 내 정거장에 도착하는 시간을 확인했다면, 정거장에는 30분 정도 여유를 두고 나가는게 좋습니다. 시골에선 시간 맞춰 나가는 것만큼 건방진 일이 없습니다.


그렇게 만발의 준비를 갖춰도 버스가 아예 지나가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럴 땐 다시 네이버 지도를 갱신해서 새로운 역에서 새로운 차를 기다리는 게 좋습니다. 화 내봤자 입만 아픕니다.


기다리는 동안 잠깐 수퍼를 들르거나 책을 보는 일도 삼가기 바랍니다. 그것 역시 시건방진 일입니다.


오직 버스가 오는 방향을 향해 안광과 염력을 발사하는 것 말고는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게 좋습니다. 맞은편 정거장에 앉아 계신 할머니가 초인처럼 느껴질 겁니다.


그러면 한 시간 정도 후에  기사님이 미스코리아처럼 손을 흔들며 코 앞을 씽, 지나갑니다. 뻥카입니다. 진짜는 15분쯤 후에 옵니다.

이런 귀한 버스는, 안내 방송도 안해주고, 정류장 역시 네이버 앱에 나온 것과 다르기 때문에 기사님께 필사적으로 내릴 역을 어필하는 게 좋 습니다.


“기사님 이거 삼산 가지요? 나 삼산갑니다! 삼산 말입니다, 삼산!!”


목청껏 질러대고 나니 옛날에 모스크바에서 살던 때가 생각났습니다. 그곳 마을버스도 이렇게 육성으로 움직이는 시스템이어서 내릴 때마다 아랫배에 힘을 잔뜩 주고 “아스따나비쩨, 빠좔스따!”를 외쳐야 했습니다.


그러면 버스 안의 모두가 조소하는 듯한 얼굴로 저를 돌아봤습니다. 아마도 그들 귀엔 “셰워추세횹, 체발!”로 들렸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보면 뭐, 어쩔 건데횹


* 보성녹차밭(대한다원)


녹차밭은 이번에 두 번째 온 것인데, 참으로 감회가 새롭습니다. 그땐 잘생긴 남자와 벤츠 타고 왔고, 이번엔 버스타고 콧물을 훔치며 왔습니다.


외양은 더 거지꼴이 됐습니다만, 실상은 지금이 더 주인으로 사는 중입니다. 겉모습이 번드르하다고 다 주인으로 사는 것은 아닙니다.   


산 위에서 한 발 떨어져서 본 바다도 무척 근사했습니다. 그러나 바다는 자고로 모래를 지근지근 밟으며 세상 모든 소음을 집어삼키는 그 거대한 소리를 귀로 직접 들어야 진짜 보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야 내 바다입니다.


그러나 녹차밭은 또 녹차밭만의 감흥이 있으니 이것은 이것대로 좋습니다. 삼나무 길과 편백나무 숲을 혼자 천천히 걸을 때의 그 소름끼치는 고요함이 정말 황홀합니다. 마치 내 안으로 깊숙히 들어가는 기분입니다.


세상만사가 지겨울 때 가끔 항문을 통과해서 내 속으로 들어가버리고 싶을 때가 있는데, 그러면 아마도 이런 고요를 느낄 것 같습니다.


*

사람들이 대한다원에는 녹차밭만 있는 줄 아는데, 뒤쪽으로 가면 차박물관도 있고, 김수자씨 족욕체험장도 있습니다.


이번 여행은 보성군의 지원을 받아 하는 것이므로, 체험기를 들려드리기 위해 족욕 마시지도 해보았습니다.(그렇습니다. 글쓰기를 열심히 하면 여행도 공짜로 다닐 수 있습니다)

마법의 녹색 가루를 뿌린 탕에 발을 담그고 녹차 한 잔 마시면서 30분 앉아 있으면 끝입니다. 가격은 12000원. 녹차는 녹차 맛이 나고, 발은 따뜻해지는 느낌입니다. 그래요, 그렇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어딘가 눈탱이를 맞은 것 같다는 기분이 든다면 재빨리 뒤편에 있는 한국차박물관으로 가시면 됩니다. 입장료 천원만 내면 5층 전망대까지, 전시실과 체험장을 전부 둘러보고 이용할 수 있습니다.

규모도 크고 시설도 깨끗하고, 전시 내용도 굉장히 알찬데, 사람이 너무 없습니다. 매표소 직원분의 지루한 등을 보고 있자니 눈물이 핑 돌았습니다. 녹차밭에 가면 꼭 차박물관도 둘러봐주시기를 바랍니다.

*

그런데 9월의 녹차밭은 유독 사람이 없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녹차밭 맞은 편에도, 군에서 박물관과 특산물 판매점까지 넣어서 3층 규모의 거대한 카페를 지었는데, 4시쯤 되니 모두 떠나버리고 저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이유는 분명합니다. 밥집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원래 가려고 했던 한정식집이 예고도 없이 문을 닫아버려서 아주 난감했습니다.


한상 거하게 먹겠다고 아침에 빵쪼가리만 먹고 나왔는데, 녹차밭 입구의 대형 식당도 사람 없다고 문을 닫았고, 다른 한식집은 공사한다고 문을 닫았습니다.


알고보니 이 주변엔 편의점도 하나 없었습니다. 저는 거의 울면서 녹차밭을 이 잡듯이 뒤졌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찾아낸 아이스크림 가게 겸 식당에서 김치볶음밥을 12,000원 주고 먹었습니다. 울지도 않았는데 밥에서는 눈물 젖은 맛이 났습니다. 오늘 눈탱이를 두 번 맞아서 그렇습니다.

*

한편으론, 여행지 가서 생길 수 있는 최악의 일이라는 게 겨우 비싼 김치볶음밥과 비싼 족욕뿐이라면, 저는 지금 무척 괜찮은 여행을 하고 있는 겁니다.


게다가 어제 최고로 만족스러운 하루를 보냈으니, 오늘은 완벽하게 불만족스러운 하루를 보내는 것이 우주의 섭리에도 맞습니다. 균형을 맞추는 일이라고 할까요?


내일은 또 어떤 이변 내지는 모험이 기다리고 있을지 아주 두근두근합니다. 산에 들어가 템플스테이를 할 계획인데 출발부터 난항이 예상됩니다. 짜릿짜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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