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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파에세이] 가난, 자기연민, 알콜중독

by NOPA


가정을 꾸린다는 것은 굉장한 책임과 희생이 필요한 일이어서 자신의 삶도 겨우 꾸리는 사람들이 결혼하고 아이를 낳는 걸 볼 때마다 늘 의아했다. 자기 입 하나 건사하는 것도 벅찬 인생에 왜 또 누군가를 책임지려고 드는 걸까.


오늘 다큐에서 본 남자도 마흔이 다 된 나이에, 다리도 온전하지 못하여 매일 진통제를 한 주먹씩 먹으면서도 스물도 안 된 베트남 여자와 결혼해 아이를 낳아 살고 있었다.


변변한 일자리도 없어 그저 새벽마다 부둣가로 달려가 뱃사람들의 잡일을 돕고 받은 물고기 몇 마리로 먹고사는 처지였다. 다리 상태는 점점 더 나빠져 의사는 지금 수술하지 않으면 남은 다리마저 불구가 될 수 있다고 했다.


그 상황에서 왜 결혼을 하여 먹여 살려야 할 식구를 더 늘린 것인지, 왜 자신의 책임을 더 무겁게 하는 것인지 나는 정말 궁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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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는 의사에게 수술은 하지 않을 거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수술하면 재활하는 데만 1년은 잡아야 하는데, 그러면 아내하고 아이가 힘들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매일 새벽 세시만 되면 아픈 다리를 끌고 부둣가로 나갔고, 뱃사람들이 물고기를 주지 않을 때도 악착같이 일을 했다. 그리고 일이 끝나면 뱃사람들이 안 보는 데서 다리를 부여잡고 진통제를 먹었다. 의사 앞에선 주먹으로 눈두덩이를 쓱쓱 훔치기까지 했다. 다리가 너무 아팠으니까.


그러면서도 쉬어야 한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아내를 베트남 친정에 보내줘야 하고, 딸 공부도 시켜야 하고, 아내와 딸이 편하게 살 집도 한 칸 장만해야 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존재 이유를 아내와 딸의 편의와 안녕의 기반을 마련해주는 것으로 삼은 듯했다.


남자는 전혀 친절한 남편은 아니었는데, 아내가 한국어 교실에서 상을 타온 일을 그렇게 뿌듯해했다. 아내가 유치원에서 일일 교사로 수업한다니까 바로 달려가 몰래 지켜보며 흐뭇해했다. 아내와 남편과 딸이 아니라 아빠와 딸과 손녀 같았다. 바로 이 기쁨을 누리기 위해 남자는 부서지기 직전의 몸으로 그 엄청난 책임을 기꺼이 떠안은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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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딸 같은 아내와 손녀 같은 딸에게서 얻는 기쁨이란 참으로 비싼 것이어서 그렇게 일을 하다간 남자의 남은 다리도 남아나지 못할 것이다. 그러면 지금처럼 오토바이를 타고 부두고 시장이고 자유롭게 누비지 못하게 될 것이고, 그러면 일을 못해 소득은 줄어드는데 약값과 병원비로 드는 돈은 더 많아질 것이다. 결국 아내가 일하게 될 것이고 딸도 공부보단 빨리 돈을 벌어야 한다고 느낄 것이다. 그런 상황에 좌절감을 느낀 남자가 술에 손을 대기 시작하면 그때부턴 지옥도가 펼쳐질 것이다.


그러나 저토록 행복해하는 남자를 보면, 그 행복을 위해 기꺼이 자신의 두 다리를 바치는 남자를 보면, 그 모든 불행의 가능성과 비용을 낮추기 위해 가정을 일구지 않은 내 선택이 과연 더 낫다고 말할 수 있는지, 내가 뭔데 타인의 삶을 내 기준으로 판단하는 것인지, 주제 파악 좀 해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KakaoTalk_20251205_203852892_01.jpg?type=w1 해남의 겨울은 가을에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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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 두 번째 다큐를 보았고, 거기선 좌절감에 빠진 가난한 남자가 술을 입에 대면서 아내를 때리고 딸에겐 미안하다고 쥐어짜고, 그러나 또 술을 마시고 또 패악을 부리고, 그래서 병원에 입원시켰더니 느닷없이 그놈 동생이 집에 불을 질러 온 가족이 한겨울에 파카 한 장 없이 컨테이너에서 바들바들 떨면서 사는 것을 보게 됐고, 그래서 고작 19살짜리 여자아이가 공장에서 일하며 나머지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는 것을 보면서 제발 가정 좀 꾸리지 말라고, 제발 혼자 불행하라고, 다시 남의 삶을 판단하고 재단하고 비난하게 됐다.


저소득층 남자 중 좌절감에 압도될 때 술의 유혹을 물리칠 만큼 강한 사람은 극히 드물다. 그들 다수는 너무나 유약하여 처음에는 괴로워서 마시다가 나중에는 마시기 위해 괴로움을 짜내고, 그러다 가짜 괴로움의 약발이 떨어지면 그 자신이 괴로움의 원흉으로 변해 존재의 이유였던 아내와 아이들에게 패악을 부리고, 그래서 그 집 아이들은 어려서부터 아버지의 죽음을 꿈꾼다.


그런 집 아이 중 운 좋게 공부를 놓지 않은 녀석이 대학에 가서 문학을 전공하게 되면, 도스토옙스키에 근원적 일체감을 느껴 정신을 의탁해 살다가 멋모르고 쓴 첫 번째 소설부터 부친 살해 테마가 핵심 주제로 드러나 있는데도 마치 순한 맛 소설인 양 제목을 '개구리' 같은 걸로 짓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집은 작가가 되기에 그리 나쁜 환경은 아니라고 할 수 있는데, 우리 집 이야기는 아니고 그냥 옛날에 좀 알던 집 이야기다.


그러나 가난과 자기연민과 술이 합쳐지면 주님도 구제 못 하는 그악스러운 인간이 된다는 건 통계적으로 너무나 자명한 사실이므로, 가난한 알콜 중독자들이여, 제발 외로워도 슬퍼도 어금니 꽉 깨물고 혼자 사십쇼.

KakaoTalk_20251205_203852892_12.jpg?type=w1 오늘은 버섯장을 만들고 겉절이를 하고 계란을 구웠다. 알콜중독자는 아니지만 성격 파탄자라 이빨 꽉 깨물고 혼자 사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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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성격파탄자는 크리스마스 장식도 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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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이야기가 궁금하시면 ▼▼▼

https://blog.naver.com/nopanopanopa/224098194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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