컴퓨터가 더는 버틸 수 없을만큼 용량이 찼다. 음악도 버리고, 영화도 버리고, 사진도 있는 힘껏 버렸는데, 10기가 밖에 남지 않아서 한글 파일 따위를 열어도 버벅였다. 결국 미루고 미루던 대대적인 사이버 이사를 해야했다.
케케묵은 외장하드를 꺼내서 안에 담긴 내용물을 옆으로 좀 밀어 백업을 위한 자리를 마련했다.
옛날에 백업해둔 것들을 보니 들춰보지도 않을 문서들을 USB고 외장하드고 이곳저곳에다 잘도 복사해서 쌓아두었다. 이참에 USB를 전부 비우고 모든 자료는 외장하드 하나에만 저장해서 관리하기로 했다.
옛날 글과 사진을 보면서 아련해졌다가 또 내가 아닌 것 같다가 언제 이런 적이 있었나 싶기도 했다. 그 시간들에 빠져 이틀을 보냈다. 잠시 굴속에 들어갔다 나왔을 뿐인데 세상은 벌써 48시간이 지나 있었다.
굴속에서 나는 USB 5개를 포맷했고, 넷북 하나를 포맷했고, 이 모든 사태의 원흉인 메인 컴퓨터를 포맷하여 500기가나 되는 널찍한 사이버 공간을 얻게 되었다. 꼭새집으로 이사가는 기분이었다.
드디어 외장하드에 백업해둔 자료를 조심스레 새집으로 부으려는데, 자꾸 파일이 읽히지 않는다는 경고가 떴다. 스캔 프로그램을 돌리니 20만 개가 넘는 파일 중 19만 개 정도에 오류가 발견됐다고 했다.
이제 너 하나에만 저장할 거야, 라고 했던 그 외장하드가 고장 난 것이었다. 그것은 나의 3년 치 첫 문장 파일과 4년 치 강의 파일, 책 원고와 소설들, 그리고 20년 치의 사진을 모두 품은 채 잠들어버렸다.
이 참극을 어떻게 예상한 건지 나는 그 와중에 퇴고 중이던 소설 원고 딱 하나만을, 외장하드가 아닌 USB에 따로 저장했었다. 그게 내가 미치지 않을 수 있던 이유다.
혹시 시간이 지나면 외장하드가 마음이 좀 풀어지지 않을까 싶어 거의 매 시간마다 외장하드를 열어보는 중인데 그때마다 사진 한 두장, 파일 한 두 개가 부활해 있었다. 20만 개의 파일 중에서.
외장하드가 감질나게 뱉어낸 사진들이다.
스물셋. 나트랑, 신혼여행 중. 시발.
마흔, 일산. 은둔 중인 나는 층간 소음과 잃어버린 데이터와 고쳐도 고쳐도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 소설 때문에 병들어가고 있고, 반드시 홀로 앓아야만 하는 나만의 고독을 어금니로 으드득 갈며 마흔의 마지막 일주일을 보내는 중이다.
구경꾼들은 하나둘 비어갔다. 흥겨운 시간은 삽시간에 지난 것이다. 침팬지만이 사람들한테 아첨 떨기를 멈추고 한껏 외롭게 서 있었다. ... 문득 나는 그도 역시 침팬지의 고독을 앓고 있음을 짐작했다. 그리고 나도 그를 도울 수 없음을.
좀 전의 충족감이 포말처럼 꺼졌다. 나는 그에게서 소리 없이 밀려나 있었다. 침팬지와 옥희도와 나······. 각각 제 나름의 차원이 다른 고독을, 서로 나눌 수도 도울 수도 없는 자기만의 고독을 앓고 있음을 나는 뼈저리게 느꼈다.
박완서, <나목>
이 집은 사람이 살 곳이 아니고, 이번 생은 안온함을 얻는데 실패했으며, 나는 떠날 것이다. 이것만 다 쓰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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