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파에세이] 크리스마스 풍경 - 카페와 모텔

종알종알과 웅가붕

by NOPA


크리스마스 풍경.


아침 해가 좋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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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을 굽고 타코를 지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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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풀들을 손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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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두 달간의 부재를 견뎌낸 최후의 식충이는 상한 잎들을 떨구고 한창 몸집을 줄이더니 어제는 조그마한 꽃망울을 피워올렸다. 기특한 마음에 이파리 하나를 뜯어내어 잎꽂이를 했다. 곧 있으면 식충이가 두 개가 될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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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파리와 꽃밖에 없는 식충이는 이렇게 살아남았는데, 우람한 가지에 열매까지 맺었던 레몬 나무는 끝내 죽었다.


언제나 느끼지만 덩치가 크다고 강한 건 아니다. 싹 다 부러뜨려서 거름으로 묻어 놔야지. 그러면 식충이들이 나무의 사체를 먹고 무럭무럭 자랄 것이다.


일산으로 돌아와 마음이 헛헛해서 뿌린 씨앗 중에 쑥갓이 둘, 루꼴라와 로메인이 각각 하나, 그리고 모르는 애가 하나 싹을 틔웠다. 무럭무럭 자라거라. 그럼 너희를 먹고 나도 무럭무럭 자랄 테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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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느지막이 카페에 왔다.

30대 커플이 커피 한 잔도 안 시키고 심드렁하게 앉아서 핸드폰만 두드리다가 간 자리를 십대 커플이 채웠다.


앳된 남녀는 너무너무 일상적인 대화를 세상에서 가장 큰 비밀을 이야기하듯, 우스워죽겠다는 듯, 한 시간 동안 종알종알, 킥킥거렸다. 세상 재미없는 이야기를 저토록 진지하게 호응하며 웃어주다니. 저 나이대의 연인들은 얼굴만 보고 있어도 모든 게 채워지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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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여자아이가 오늘 우리 며칠인 줄 아냐며 기습 질문을 했고, 남자 아이가 마치 이 순간만을 기다렸다는 듯 숨도 안 쉬고 "7일!" 이라고 답했다. 둘은 또 뭐가 그렇게 우스운지 꺄르르 숨이 넘어갔다.


그러다 남자아이가 노래방에 가자고 했고, 여자아이가 오늘 목이 별론데, 라며 튕겼다. 그러자 남자아이가 그럼 제가 몇 곡 불러 드리겠습니다, 그냥 앉아 계시죠, 라고 했고, 둘은 사이좋게 카페를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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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 호사가들은 크리스마스에 이렇게 모텔 공실이 많다고, 사랑이 실종된 시대라고 걱정하던데, 애들은 모텔 같은 거 없이도 잘만 사랑한다.


크리스마스에 모텔 공실이나 검색하며 사랑이 실종됐다느니, 대혐오의 시대라느니 근엄한 척하는 어른 쪽이 아무래도 더 걱정스럽지. 모텔에 있는 게 사랑이라고 누가 확신해? 그냥 웅가붕가가 있는 것이지.


KakaoTalk_20251225_151707753.jpg?type=w1 신발장을 열 때마다 오늘은 어떤 연장을 들고 갈지 고민한다. 혐오는 이런 게 혐오지.

*

드디어 구례 체류 센터에서 귀촌인을 모집한다. 지리산으로 갈까, 두륜산으로 갈까. 가긴 가야 되는데, 윗집 아이들이 유약한 도시인은 어서 시골로 꺼지라고 밤마다 천장을 두드려대는데, 나는 대체 무엇에 발목을 잡혀 고민하는 걸까.


새해엔 좀 더 단순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돼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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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자 해남 풍경. 가긴 가야 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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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이야기가 궁금하시면 ▼▼▼

https://blog.naver.com/nopanopanopa/224120351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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