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파에세이] 평범하게 행복한

by NOPA


어제를 곰곰이 곱씹어보니 이게 행복의 맛인가 싶다.


부모께서 한 달에 한 번 오는 게 귀찮다고 요즘은 두 달에 한 번 오시는데, 그게 어제였다.


전라도 집안에서는 사람을 집으로 초대해놓고 배 터지겠네, 소리가 안 나오면 큰 죄를 짓는 것인지라, 거기다 지금은 평달도 아니고 연말연시인지라, 많은 것들을 차려냈다.


수육에 알탕에 탕수육에 양장피까지, 80퍼센트는 홈플러스 밀키트의 도움을 받아 차렸다기보다는 샀다는 말이 더 맞긴 한데, 사는 것도 푸르고 데우고 할 게 많아서 아무튼 애썼다.


아빠는 디저트로 곶감을 좋아하고 엄마는 치즈케이크를 좋아하고 언니는 아이스크림을 좋아하고. 또 아빠는 붕어빵을 좋아하고 나는 앙금파이를 좋아하고 엄마는 시럽 올려진 패스츄리를 좋아하고. 나는 과일은 체리를 좋아하고, 엄마는 사과를 좋아하고, 언니는 포도를 좋아해서 모든 것을 다 준비했다.


배가 터질 것 같다며 가족들이 바닥에 배를 끌고 가는 모습을 흡족하게 바라본 후 떠나간 자리를 치우고 청소하고, 스쿼트 2백 개를 하고 찬물 샤워를 하고 책상 앞에 앉으니 졸음이 쏟아졌다. 손님이 올 때만 보일러가 돌아가는 집이라 바닥은 따뜻하고, 배는 부르고, 앞으로 두 달간 요리할 일 없다는 안도감이 이불처럼 포근했다.


해남, 저녁 6시.


그렇게 서너 시간 졸다가 쓰다가 놀다가 하고 있는데 전화가 왔다. 밤 10시였다.


이제까지 안자고 뭐 했단가.

자네 전화 올 줄 알고 기다렸지.

그랬는가? 촉이 아주 좋고마잉.


해남에서 사귄 친구고 둘 다 85년생 여자다.

우리 부모님은 40년 서울 생활로 오염된 사투리를 써서 이제 그건 남도 사투리도 뭣도 아닌게 되어버렸는데, 친구는 순도 백 퍼센트의 남도 사투리를 구사하여 한 마디 한 마디가 귀했다. 오며 가며 귓등으로 배운 사투리로 장단을 맞춰봤는데 뭐라고 안 하는 걸 보면 그럭저럭 들어줄 만했나 보다


읍내에서 양꼬치 먹고 들어가는 길에 문득 내 생각이 났다며 요즘은 뭐하고 사는지, 아픈 덴 없는지 묻고는, 정말 그것만 묻고는 끊었다. 이런 게 시골 인류의 정이라는 것인가? 사십 평생 도시 친구들에게선 한 번도 이런 전화를 받아본 적이 없어서 코끝이 조금 찡했다. 그러나 카톡은 꼬박 이틀이 지나도록 답장을 안 하는 친구이니 너무 감동하지 말자고 마음을 다잡았다.


친구가 해남읍에서 집까지 운전해 가는 까만 길을 상상했다. 가로등 하나 없는 새까만 시골길. 해남에 있을 때 그 길을 40분간 달려 나를 집까지 데려다주곤 했다. 안 졸리게 옆에서 내가 좀 재잘거려 줘야 되는데, 너무 멀리 있네.


해남의 밤. 반딧불이


따뜻하고, 나른하고, 아련하고.

특별한 일없이도 행복으로 가득찬 나의 밤을 망치기 위해 윗집 녀석이 또 열심히 뛴다. 간만에 밤에 기운이 넘치는 나도 열심히 창문을 두드리고 천장을 두드려 화답한다.

괜찮은 날이었다.

오늘자 해남의 아침. 여전히 예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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