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날을 시작하기 전에 모든 것을 마무리 지으려고 이것저것 미뤄뒀던 것들을 벌려놓았다. 몇 군데에 메일을 보냈고, 지원서를 썼고, 엄마 공인인증서를 받아주기로 했고, 새로 산 책을 펼쳤다.
메일 두 통 보낸 것 외에는 무엇도 마무리 짓지 못했다. 공인인증서는 언제나처럼 나를 좌절시켰고, 지원서는 쓰다 말았고, 책은 다 읽지 못했다.
에두아르 르베의 <자살>. 한 해의 종말을 함께 하기에 이보다 좋은 책은 없다고 생각했다.
르베는 화가였다가 사진가였다가 작가였다가 자살했다. 출판사에 이 책의 원고를 보낸 후 며칠 후의 일이었다. 마흔 둘. 얼추 내 나이다.
그래서 이 책은 반드시 마지막 날 저녁에 읽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야 나의 2025년을 분명하게 죽일 수 있을 테니까.
그런데 저녁을 먹으면서 넷플릭스의 <삼체>를 보고 말았다. 엄청나게 재밌었고, 저녁 내내 보았다.
한밤중이 다 돼서야 급하게 책장을 펼쳤지만 몇 장 읽지 못하고 덮었다. 흡입력이 굉장히 좋아서 정신 없이 읽다가는 자정을 넘길 것 같았다.
자정이 넘으면 2026년, 새해다. 부활하고 새롭게 태어나야 하는 시간이다. <자살> 같은 것을 읽고 있을 순 없다.
결국 올해의 마지막은 <자살>도, <삼체>도, 지원서도, 공인인증서도, 무엇도 마무리 짓지 못하고 전부 펼쳐놓은 채 끝났다.
*
2025년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은 대흥사에서 이 스님을 만났을 때다.
스님이 주관하는 저녁 예불에 참여한 사람이 나밖에 없어 서로 얼굴을 익혔다.
새벽엔 스님이 급하게 법당으로 들어가다가 신발 한 짝이 바닥으로 굴러 떨어졌다. 뒤따라오던 내가 신을 주워 댓돌 위에 가지런히 놓았고, 스님이 나를 알아보았다.
오후엔 절 뒤편으로 해서 산을 오르려는데 그곳에 또 스님이 있었다. 처음으로 말을 건넸다.
“이 위에 일지암은 가보셨습니까?”
“네. 올해만 여섯 번 가봤습니다.”
“여섯 번이요? 어허, 어허허허..”
말투는 할아버진데 생김새는 나보다 어려보였다. 오관이 물처럼 맑았다.
불교에서는 말 한 번 나누려면 전생에 천 번은 옷깃을 스친 인연이 있어야 한다고 믿다. 세 번 마주치고 신발을 잡아주고 말까지 나눴으니, 보통 인연이 아니다.
그러니 꼭 이번 생에 해탈하셔야 합니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한 번 인연 맺은 사람은, 그 속을 아주 까맣게 썩히는 재주가 대단하여 이번에 해탈 못 하면 내생에 어마어마한 번뇌에 시달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토록 파란 청춘이 어떤 인연으로 머리를 깎고 출가를 한 걸까. 나도 절집 주변을 자꾸 어슬렁거리면 내생엔 머리를 깎을 수 있을까?
그러나 이번 생은 글렀다.
아빠도 보내드리고 엄마도 보내드려야 한다.
게다가 엄마 쪽은 장수집안이라 보내드리고 나면 나도 여든은 훌쩍 넘어 있을 것이다.
늘 그래왔던 것처럼 모든 것은 다음 생으로 미루는 수밖에.
일단 오늘 잘 죽어야겠다.
다들 2025년 잘 죽으시고 새해에 새 마음, 새 정신으로 다시 태어나십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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