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파에세이] 고등학교 글쓰기 수업하는 법

by NOPA


다들 길한 새해 보내고 계십니까?

저는 이제야 신변잡기를 쓸 시간이 생겼습니다. 지독한 1월이었습니다.


말투가 뭔가 어색한 것 같아 돌이켜 보니, 원래 반말로 쓰던 건방지고 자유로운 영혼이었다는 게 이제야 생각납니다. 오늘만 존대를 하기로 하겠습니다. 새해 첫 글이니까. 생각해보니 새해 첫 글도 아닙니다. 그럼 그냥 쓰고 싶어서 쓰는 걸로.


강릉행 ktx는 3천 원만 더 주면 특실을 탈 수 있는데, 좋았다


오늘은 아침부터 원주에 갔습니다. 이번에도 확실한 노동의 결과를 얻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난생처음 17살 소녀들이 서른 명이나 모여있는 공간에 발을 들이게 됐습니다.


첫 번째 수업은 컴퓨터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 PPT의 마법을 활용할 수 없어 망했고, 두 번째 수업은 열렬하게 가동되는 히터 열기에 학생 80퍼센트가 숙면하는 기적이 일어나 망했습니다.


스무 명이 넘는 소녀들이 눈앞에서 잠에 취하는 모습을 보는 건 정말이지 놀라운 경험이었습니다.


짠하고 불쌍한 것들.

앞으로 수면 시간이 부족할 거라 미리 재운 것이다.

원래 글쓰기 수업 시간 따위엔 자는 게 맞다.

공부의 효율을 아는 천재 같은 것들.

늘 성인 수업만 했기에 이렇게 어린 학생들에게 글쓰기를 말하는 건 제게도 특별한 경험이었습니다. 수업은커녕 자식도 없고, 조카도 없고, 교회를 다니는 것도 아니어서 이 나이대의 소녀들은 제게 그저 관념의 영역에만 존재했기에 그들과 함께하는 모든 순간이 신비롭고 조심스러웠습니다.


그래서 자면 자게 두고, 글이 쓰기 싫다 하면 안 쓰게 뒀습니다. 원래 싫다는 사람은 싫어하게 내버려두는 편입니다. 어찌보면 썩 좋은 선생은 아니긴 하나 싫다는 사람 억지로 시켜서 잘 되는 경우를 못봤습니다. 안 싫어하면 다행이지요. 그러니 죽고 사는 문제 아니면 내버려 두는 것으로.


그렇게 강사는 물렁하고, 수업은 입시 글쓰기와 무관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아이들이 슬슬 잠에 빠져드는 가운데, 대여섯명의 학생만큼은 무거운 눈꺼풀과 사투를 벌이며 어떻게든 제 얘기를 들으려고 안간힘을 썼습니다.


그게 참 신기했습니다.

열 명이 있으면 그곳엔 글을 좋아하는 사람이 반드시 한 명 있습니다. 언제나 그랬습니다.


바로 널 위해 내가 새벽 다섯시에 일어나 경의선을 타고 기차를 타고 택시를 타고 여기까지 달려온 것이다. 너에게 끝까지 쓰라고 얘기해주려고. 최소한의 생계 위에서 쓰는 삶의 즐거움을 알려주려고.


30명 중 다섯 명, 다섯 명 중에서도 정말 쓰게 될 단 한 명, 그 한 명에게 제 이야기가 닿았다면 오늘의 수고는 조금도 아쉽지 않습니다. 분명 저는 그 한 명을 위해 우주가 보낸 사람일 테니 말입니다.



앞으로 백년은 더 살아야 할 아이들을 보는 일은 뭔지 모르게 안쓰럽고 서글프고 짠하면서도 묘한 감동이 있습니다.


동시에, 내가 늙었다는 사실이 다락같이 깨달아집니다. 맨날 혼자 집에만 있으니 전혀 몰랐는데, 해남에선 새파랗게 어린 친구로 통했는데, 이곳에 오니 저만 노인 반점이 득시글합니다. 늙으면 죽어야지 하는 생각이 절도 듭니다.


그 와중에 속눈썹이 참 길다고, 어떻게든 장점을 찾아내 말해주던 소녀가 참으로 고마웠습니다. 덕분에 좀 더 살아봐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다들 단단한 정신과 유연한 몸으로 앞으로의 백년을 뚜벅뚜벅 걸어가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저는 완벽한 탈고란 허상의 개념임을 받아들이며 이번에도 불만족스러운 원고를 그냥 보내버렸습니다. 그 이야기가 담긴 칼럼입니다.

https://cms.mygoyang.com/news/articleView.html?idxno=87517


칼럼에, 수업 준비에, 첫문장에, 허리가 부러지는 줄 알았습니다. 역시 늙으니까 죽지도 않으면서 자꾸 죽는 소리만 늡니다.


소녀들, 반가웠다.

좋아하는 걸 찾아내거라.

그걸 꽉 쥐고 앞에 놓인 백년을 무사히 관통하기를!


***

지난 이야기가 궁금하시면 ▼▼▼

https://blog.naver.com/nopanopanopa/224158118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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